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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 <당신은 이미 읽혔다> (흐름출판. 2012,11.)

 

 

 

 

 

 

 

 

 

 

경험이 쌓일수록, 관심을 갖고 생각을 해볼수록, '대화'에서 정작 말이 차지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도중은 둘째 치고 심지어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

 

람과 그가 말할 내용에 대한 일정량의 정보를 구비해 놓는다.

 

 

 

 

얼마 전 시청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이다. 제작진은 '실험자'에게 한 번은 단정하고 검소한 차림

 

게 하고, 한 번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명품을 걸치게 한 뒤 각각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

 

가서 시민들에게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가 어떤 사람일지, 그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을지, 그의 말

 

을 믿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설문을 행하였다.

 

 

 

 

옷을 입은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고, 표정, 자세 등에 특별한 변화를 주지 않았음에도, 시민들은 검소한 차림의

 

경우 직업이 공무원일 것 같다, 단정하고 바른 사람일 것 같다는 대답을 했고, 명품 차림의 경우에는 자신감이

 

있지만 다소 오만할 것 같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을 것 같다, 는 식의 대답을 했다. 프로그램에서는 학자의 언급

 

을 빌어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추가로 설명을 했지만,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분석이나 해명이 맞든 말든,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대화의 성격에 대해 일정량 이상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증명 가능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규정하는 '비언어적 요소', 그러니까 말 이외의 요소로 패션을 언급하며 시작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

 

는 '검소한 차림'이 검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의도한 것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던 한편, '명품 차림'이 돈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의도하도록 설계된 것은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다. 실험자가 걸친 옷과 가방, 신발 등이

 

명품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패션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긴 뜻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를 구성하는 중요한 항목은 패션 뿐만이 아니다. 그의 성별, 연령, 국적 등의 항목들은 크

 

게든 작게든 분명한 영향력을 갖고 있을 터이다. 그 중 내가 오래 전부터 큰 관심을 두어 온 대화의 비언어적 요

 

소는, '제스츄어', 그러니까 '보디 랭귀지'이다. (어색하긴 한데, 나도 이때껏 모르고 살다가 이 독후감을 위해 맞

 

춤법 항목을 찾아 보니 '바디 랭귀지'가 아니라 '보디 랭귀지'쪽이 맞는 말이었다. 자꾸 쓰다보면 익숙해지겠지

 

싶어 맞는 쪽으로 쓰도록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일상 생활의 대화에서도 청자보다는 화자 쪽인 경우가 많았고,

 

또 강의를 많이 하게 되니 보디 랭귀지의 효과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느끼게 되는 순간이 많았던 개인적 특성 때

 

문일 것이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내가 독후감을 위해 급하게 그린 그림이다. 요새의 학생들은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와는 달리 강사인 내

 

가 들어가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할 때에도 좀처럼 조용히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의 중에 재미있는 유

 

머를 섞었다든지, 혹은 설명을 하던 도중 무심코 욕설이 나간다든지 하는 순간에는 예외 없이 웃음과 함께 이런

 

런 리액션이 터져 나온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의의 흐름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고, 그것은 한 차례 끊기고

 

나면 회복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믿고 있는 나는, 소동이 자연스레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조용해라'라

 

고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편이다.

 

 

 

 

이때, 위 그림에서 왼편의 경우처럼 학생들을 향해 내민 손에서 손바닥을 위로 한 채로 '조용히 해라'라고 말하

 

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혹은 또 하나의 웃음 소동을 유발시키는 한편, 오른편의 경우처럼 손등을 위로 한

 

채 '조용히 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다. 나는 이 작동 방식을 잘 알고 있지만, 이 독후

 

감을 위해 지난 주의 강의에서 두 차례의 실험을 해 보았고 결과는 지금까지의 믿음과 동일했다. 말하자면, 대화

 

의 맥락과 메시지는 동일했는데, 단지 손이 엎어졌는지 뒤집어졌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혼자 이런 실험을 한 뒤 '전부 내 예상대로였어...'하며 싸이코패스나 쏘시오패스처럼 큭큭거리지 않더라도, 우

 

리들 대부분은 보디 랭귀지의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 대체로 적확하게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냥 안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휘날리도록 고개를 저으며 김치를 안 먹겠다는 아이, 위로의 말이 필요한 자식에

 

게 먼저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은 뒤 대화를 시작하는 엄마, 손주에게 용돈을 건네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할아

 

버지 등, 대부분의 우리는 보디 랭귀지의 프로페셔널이다.

 

 

 

 

하지만 어떤 보디 랭귀지는 너무 작아서 관찰할 수 없기도 하고, 너무 익숙해서 관찰할 수 없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관찰할 수 없기도 하다. 이럴 때,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의도'를 포착하지 못하거

 

나 혹은 오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비효율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런 주제에 대해 논하

 

고자 하여도, 보디 랭귀지에 해당하는 사례 정도라면 깔깔대며 몇 개씩이나 서로 댈 수 있겠지만, 작동의 매커니

 

즘이나 대처 방법 등에 대해서까지는 생각해보기 어렵다. 그런 참에 만난 또 하나의 스승. '세계적인 몸짓 언어

 

의 권위자'라고 소개된 앨런 피즈/바바라 피즈의 2004년 작, <당신은 이미 읽혔다>이다.

 

 

 

 

 

 

 

 

 

 

 

 

 

 

원제는 <The Definitive Book Of Body Language>. 나는 이런 건조한 원제가 완전히 다른 새 제목으로 번역되는

 

경우 평균점 이상의 결과가 나오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꽤나 높은 점수를 줬다.

 

'개인적'이라는 전제를 붙인 것은, 번역서의 편집자가 오래 전의 만화인 <북두신권>의 명대사인 '너는 이미 죽어

 

다'를 의식하고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홀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 자체로는 평범했지만 -개인적

 

인-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높게 평가한 것일 뿐이니, 별볼일 없는 제목이라 혹평하고 싶은 분을 만나도 별로 반

 

론할 의지는 없다.  

 

 

 

 

책은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하나의 보디 랭귀지에 대해 다루고 있고, 그 장 내에는 해당 보디 랭귀

 

지의 자세한 양상과 설명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위에서 예를 들었던 손바닥 실험의 경우는 5장인

 

'손짓'에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이 장에는 그 외에도 '손바닥 비비기', '엄지로 손가락 문지르기', '양손 끝을 마주

 

대고 세우기' 등의 사례들이 실려 있다. 장 별로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제일 짧은 장에도 네 개에서 여덟 개 정

 

도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고, 7장인 '시선' 같은 경우에는 거의 20여개의 사례가 있으니,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

 

며 읽을 거리는 충분하다.

 

 

 

 

 

 

 

 

 

 

 

 

 

내용에 못지 않게 재미있는 것은 그림해설이다. 이 책에서 보디 랭귀지의 실제 사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

 

은 정치인,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의 사진과 위처럼 단순화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의 두 가지인데, 나는 그

 

림 쪽이 좀 더 직관적으로 느껴져 더 재미가 있었다. 위 그림 같은 사람, 정말 어디서 한 번쯤 본 적 없는가? 나

 

는 순간 이런 자세를 잘 짓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음이 푹, 하고 터졌다.

 

 

 

 

크게 아이콘화되었다는 것 외에도 무표정한 얼굴이나 미묘하게 비율이 맞지 않는 신체는 이 책의 그림을 관통하

 

는 '화풍'인데, 나는 기묘하게 거기에 꽂혀서 몇 장은 큭큭거리며 따라 그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맞아, 그런 사람 있어'하고 박수를 치며 느끼는 가십성의 즐거움만이 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한 예를 들

 

면 다음과 같다. 위의 그림을 보면, 비록 그림이지만 우리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다. 고정된 눈빛, 꼭

 

다문 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굳은 팔짱. 굳이 그림 밑의 설명을 읽지 않아도, 이 사람의 '의사'는 이미 결정되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로 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거나 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거기에 이 책은 색다른 해결책을 내놓는다. 말로 돌릴 수 없으면, 행동으로 돌려라! 굳은 팔짱은 그의 굳은 의사

 

의 표현이다. 팔짱을 풀게 하면, 마음도 어느 정도 풀릴 것이다. 본문 중의 구체적 행동 지침을 인용해 보자.

 

 

 

 

...상대의 팔짱 낀 자세를 바꾸도록 만드는 가장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에게 들고 있을 물건이나

 

할 일을 제공하는 것이다. 펜이나 책, 설문용지 등을 건네면 상대는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된다.

 

그러면 보다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마음도 더 열리게 된다...   ...또 볼거리를 제공하여 상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당신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혹시 질문이 있으신가요?' 혹

 

은 '당신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몸을 뒤로 빼며 상대에게 발언

 

권을 넘기면 된다. 손바닥을 내보임으로써 당신이 진실한 사람이며 상대도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길 바란다

 

는 의사를 비언어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위 설명 중 일부는 내가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만약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한다'는 설명

 

이 그저 말장난 같다면, 자기 삶에서의 몇가지 사례들을 떠올려 보면 좋겠다. 이를테면, 마주보고 이야기하던 상

 

대가 옆으로 가까이 와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느껴지던 차이라든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것은 믿

 

음이 가지만 눈을 내리깔거나 곁을 흘긋거리며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나 변명처럼 느껴진다든지. 경험의 반추를

 

통해 이 책의 설명과 대책이 믿을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면, 그 뒤로부터의 독서는 마치 무림의 비급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의자의 배치를 조정하여, 상대방이 취할 보디 랭귀지의 성격을 아예 미리

 

해놓고 있다. 강의실, 커피숍 등과 같이 애당초 좌석의 배치가 지정되어 있거나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곳에서

 

의 대화를 주로 해 온 나로서는 읽자마자 어떤 장면을 연상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직감적인 공감을 할 수는 없었

 

지만, 그림에 딸린 설명을 차근차근 읽다 보니 과연 의도하는 효과가 날 수도 있겠다고 납득하였다.

 

 

 

 

이 문제는 사실 초보적인 질문을 가진 바 있었다. 나는 TV의 오락 프로그램을 아주 좋아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토크쇼를 특히 좋아하는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꽤나 많은 수의 토크쇼들이 있는데도 패널과 게스트의

 

좌석 배치가 비슷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무릎팍도사'의 경우에는 메인 호스

 

트인 강호동 씨가 게스트와 마주보고 앉는다. 집단 호스트 체제인 '라디오 스타'의 경우에는 패널과 게스트가

 

반원형을 구성하며 앉는다. '정치 예능'의 구축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jtbc의 '썰전'은 세 명의 고정 패널이

 

삼각형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는다. 이 배치는 어떤 의도를 갖고 있을까. 또 그 의도는 성공했을까.

 

 

 

 

국가 별로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게스트와 패널 사이에 별다른 사물이 없거나 혹은 일상적인 모양의 작은 테이

 

블 정도가 있는 한국에 비해, 미국의 인기 토크쇼인 지미 키멜 쇼, 투나잇 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 등은 아주 큰

 

원목 데스크가 놓여져 있다. 한국의 토크쇼를 보다가 미국 토크쇼를 보면, 호스트가 큰 책상 뒤에 '숨어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 차이는 양국의 시청자들의 어떤 특성이 반영된 결과일까.

 

 

 

 

 

혼자서는 별 답이 안 나왔고, 논문의 검색어나 관련 연구자를 찾기도 어려워 그 이후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기

 

껏 찾아낸 것은, '화합형'이라고 평가받는 유재석 씨의 경우 '놀러와'나 '해피투게더' 등에서 본인은 중간에 앉

 

고 한쪽엔 고정 패널, 한쪽엔 게스트를 앉힌다, '공격형'이라고 평가받는 강호동 씨나 이경규 씨의 경우에는 '무

 

릎팍 도사'나 '힐링 캠프'에서 보듯 본인이 게스트와 1:1로 마주보며 분위기를 유화시킬 수 있는 여타 MC들을

 

한 쪽 옆에 앉힌다, 등의 '현상'들 뿐이었다. 이걸 어찌 공부한다, 하던 차에 이 책에서 일단의 실마리를 얻은 셈

 

이다.

 

 

 

 

 

 

 

아무튼, 애당초의 관심에 부응하는 설명이나 뜻하지 않게 해결된 의문이나 내게는 축복 같은 독서였지만, 여타

 

의 독자들에게도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와 쾌감을 보장하는 독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대부분의 우리 인간

 

에게 보디 랭귀지란 떼어놓을 수 없는...  아, 엄숙한 마음으로 장중한 결말을 맺으려다 '보디 랭귀지'라는 단어

 

를 적고 있자니 웃음이 나고 말았다. 웃음이 나니 뭔가 제대로 된 결말을 짓고 싶은 마음도 우스꽝스럽게 여겨져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런 유치한 마음 또한, 청중이 있었다면, '전문가적인 손길'과 '정제된 표정'을 통해 다

 

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위대하고나, 보디 랭귀지의 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