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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김현철, <울랄라 심리카페> (추수밭. 2013,1.)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논문과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가 나를 작고 깨끗한 방에 가둬 놓고, 지금의 '나', 그러니까 내 생활양식, 가치판단의 기준, 정신세계 등

 

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인물, 사건, 서적 등을 백 개쯤 써 보라고 한다 치자. 당연한 이야기이겠

 

지만, 백 개를 다 쓸 때까지는 나갈 수 없다. 잡생각이 많은데다 평소 버스나 지하철에서의 시간을 이런 문제들

 

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대부분 쓰고 있는 나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정답'이 존재한다

 

는 가정 하에, 내가 쓴 백 개 중 몇 개나 '정답'과 일치할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상담의 과정에서 상담의가 찾아내는 고민, 증상의 원인들이 실제로 본인은 전혀 자각

 

하지 못하고 있던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처방전이나 해결책 또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

 

다면 매일같이 매달려 있는 피상적 문제들 말고 내 모든 고민의 근원은 무엇이고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

 

소해야 하는지,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과 돈을 투자해 병원에라도 일단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일까?

 

 

 

 

 

새로운 의문에의 한 해답인 정신과 전문의 김현철 씨의 신작. 표지와 제목에 대해서는 별다른 인상을 못받았고,

 

부제인 '온 국민 멘붕 방지 고민 상담소'가 책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내 경우에는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정신의학 상담 코너의 패널로 그를 접한 것이

 

최초였는데, 책날개의 소개에 따르면 그 이후로도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 '스펀지', '두 시의 데이트' 등의

 

TV,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방위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에는 '얼마 전에

 

무한도전 정신분석 편에 나왔던 잘 웃는 아저씨'라고 하면 속도가 빠르다.

 

 

 

말투는 상냥하고 상담자의 말에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어주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낚아채 명쾌하

 

게 판정하고 설명하는 솜씨가 그의 유명세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원인을 적시하고 해결책을 전달해 내

 

는 데에 있어서도 되도록이면 상담자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려를 보여주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서도

 

단지 상담의 한 케이스를 공부했다기보다는 함께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 그래서인지 유난스레

 

여성 상담자가 많다고도 한다. -

 

 

 

라디오나 TV는 시간의 제약이 있어 반복적이고 심층적인 상담이 어렵다. 그래서 (내가 접해 본) 그의 방송 방식

 

은, 일단 미리 접수된 사연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추려내어 소개하고, 그 상담자 개인만을 위한 특수한 상담이

 

아니라 되도록 시청자 일반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진단, 처방을 설명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책

 

은 그러한 라디오, TV 방송의 형식을 딴 55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작인 <불안하니까 사람이다>와 <우리

 

가 매일 끌어안고 사는 강박>은 불안과 강박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잡아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들어간다.)

 

 

 

본문은 크게 5장으로 나뉜다. 각 장은 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구성되었는데, 다섯 개 모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일단 각 장의 목차만을 따 옮겨 놓는다.

 

 

 

1장 '나' 자신을 알라 (10꼭지)

 

2장 '사랑'도 사람이 한다 (15꼭지)

 

3장 '가족'의 배신을 허하라 (12꼭지)

 

4장 '직장'은 직장일 뿐 (9꼭지)

 

5장 눈치 보지 않고 단호하게 살 권리 (9꼭지)

 

 

 

네 쪽에서 다섯 쪽으로 이루어진 한 꼭지는 반 쪽 가량으로 요약된 사연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요약은 그 사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만 남기는 정도로 간결하다. 그 뒤로는 저자의 '상담'이 이어지

 

는데, 상담은 다시 1, 2, 3이라는 작은 구분을 갖는다. 3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6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구분은 해당 내용의 기능에 의한 것인 듯하다. 55꼭지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다음의 순서를 따른

 

다.

 

 

 

(사연 요약) - 상담자의 주변적 정보 소개나 다른 예시를 통한 가벼운 접근 - 상담자의 증상 진단 - 상담자의 증

 

상이 갖는 일반적 특성 소개 - 증상의 원인 분석 - 해결책 제시

 

 

 

55개나 되는 한 꼭지 내에도 이렇게 많은 구분이 있으니, 케이스 별로 깊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기우였다. 짧게 요약되어 있을지언정 고민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나도 상당수 공유하고 있고 지인들

 

과의 술자리에서도 가장 자주 듣는 것이었다. 그 원인 분석과 해결책 또한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

 

다. 분량을 감안하면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롭게 접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런 정보에서 이런 분석을 이끌

 

어 내다니, 하고. 단지 지적인 흥미만이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행동에는 좀 더 많은 생각을, 그리고 생각에는 좀

 

더 많은 관용을, 이라고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케이스 별로 길이가 길지 않으니 하나쯤 소개해 두어도 좋겠지만, 서점에 가서 한두 꼭지쯤 직접 읽어보고 재미

 

를 만끽하시길 바란다. 근래 읽었던 책들 중에는 가장 보편적으로 추천할만한 것이기도 했다. 얼마 전 소개했던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경우, 본인이 무기력을 직접 겪고 난 뒤 쓴 것이라 독자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시

 

종일관 유지되었지만, 무기력이라는 주제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전공서적의 일종으로 접할 수

 

밖에 없긴 했다. 그래서 독후감의 끝에 '많은 사람에게 권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

 

<울랄라 심리 카페>에는 55종의 고민, 증상이 나온다! 그 중 하나라도 걸려들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은 이미 성

 

인이거나 혹은 주변에 측량 불가한 민폐를 끼치며 살고 있는 양반일 것이다. 게다가 따뜻, 이라면, 이 형 정말 

 

따뜻에 강박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따뜻하다. '괜찮아'가 도대체 몇 번 나오는지. 정말로, 뭔가 이상

 

한데 병원 갈 용기까지는 아직 나지 않을 때 꼭 한 번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