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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피터 챈키지, <자연 모방> (에이도스. 2013, 3.)

 

 

 

 

천문학을 제하고는 도대체 몇 년만에 읽는 과학책인지 모르겠다. 독서의 폭이 좁아지는 것에 신경을 쓰던 차에,

 

한 온라인 서점에 '4월은 과학의 달'이라는 표어가 붙어있길래 그렇다면 과학책에 도전해 보자! 하고 고른 책.

 

먼저, 저자가 결론부에서 정리해 놓은 이 책의 핵심주장을 옮겨보자.

 

 

 

1. 말은 고체물리적 사건처럼 소리 난다.

 

2. 음악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소리 난다.

 

3.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와 음악이 자연을 흉내내도록 설계한 문화적 진화 덕에, 즉 자연 응용 덕에 현대인이 되었다.

 

 

 

누워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진짜?'라고 외쳤다. 그런데 왜 나는 전혀 처음 보는 주장 같

 

지?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책의 9할 정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독서를 마친 것이다.

 

 

 

수험생 시절부터 대학 진학에 실패하게 된다면 발목을 잡는 것은 과학일 것이다, 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결과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9할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결론부까지 잡고 읽고, 그리고 신이

 

나서 독후감까지 쓰고 있는 지금의 기분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게 된 것은, 음성학이니 신경생물학이니 하

 

는 전문 용어가 난무하고 있는데도 마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저자의 화술에 깝

 

빡 속아넘어갔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2중의 당의정과 같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쉬운 이야기인 척 하는 태도에

 

한 번 속고, 쉬운데다가 재미있는 이야기인 척 하는 유쾌한 화술에 두 번 속고.

 

 

 

아무튼 위의 세 주장을 얽어 내가 이해한 바를 소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명을 촉발하고 발전시킨 것은 언어이고, 문화를 꽃피우게 만든 것은 음악이다. 우리는 이러한 언어와 음악

 

담당하는 기관이 오로지 사람의 뇌 속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견해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언어와 음악을 사용해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언어와 음악 쪽이 사람에 맞도록 진화해 왔다

 

는 것이다.

 

 

사람도 동물인 이상, 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자연의 모습이다. 당연히 사람의 뇌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

 

상과 소리에 반응하도록 맞추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와 음악은 최대한 자연의 소리가 갖는 법칙

 

근접하는,  - 구분해서 이야기하자면 언어는 물리세계에서 고체가 내는 소리에, 음악은 사람의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에 - 곧 '모방하는' 식의 전략을 갖추었고 성공했다. 그리고 사람은 이런 언어와 음악을 통해 문명

 

을 발달시켰다.

 

 

 

인데, 나는 저 주장을 보면서, 나도 과학을 이해할 수 있나봐, 라고 신이 나서 읽었던 본문의 내용들 중 별로 떠

 

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만 기묘하게 달뜬 기분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이 기분을

 

이어 저자의 전작인 <우리 눈은 왜 앞을 향해 있을까>를 읽어보기로 했다. 이해를 못하겠는데 재미있고 대단하

 

다고 생각하게 만들다니, 정말 인생도처유상수다.

 

 

 

원제인 <Harnessed>는 우리말로 옮기면 '응용된' 쯤 되는 것 같다. '응용'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설명하고 있

 

는 개념 중의 하나이다. 제목은 원제 쪽이, 표지 디자인은 번역서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끝에 원서의 표지 디자

 

인을 덧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