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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3

국립국어원 선정 2012 신조어

 

 

 

 

 

재미있는 자료를 발견하여 참고 삼아 올려 둔다. 국립국어원(www.korean.go.kr)에서 2011년 7월부터 2012년 6

 

월까지 조사하여 작년 12월에 보고서로 작성하였다는 '2012 신조어' 목록이다. 그림화일로 정리된 위의 목록에

 

는 7가지만이 소개되어 있지만, 관련 기사를 뒤져보니 적어도 20여개 이상의 단어들이 '신조어'로 인정받고 있

 

었다. 보고서에는 더 많이 소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신조어(新造語)란 새로 만든 말이다. 기존의 단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니 구성의 원리

 

에 있어서는 다소 조악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시대의 주요한 조류들을 반영한다는 면에서는 나름의 연구 가치가

 

높지 않을까 싶다.

 

 

 

목록들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장기화된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영향이 투영된 단어들이다. 인상적인

 

점은, 경제 위기가 경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그의 가족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

 

치고 있음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유행하던, 경제 위기와 관련한 신조

 

어는 대체로 위기에 맞닥뜨린 본인의 삶을 묘사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취업 상황과 관련한 연령별 신조

 

어이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38세쯤 퇴직)

 

사오정(45살이면 정리해고 대상)

 

오육도(56세가 넘도록 회사에 있으면 도둑)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五賊)

 

 

 

이에 비해 2012년의 신조어들은 그렇게 위기에 봉착한 개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의존하는

 

상들을 묘사한 것이 많다. 경제적 위기가 본인, 혹은 배우자와의 맞벌이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

 

일반화되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예를 들어 '신캥거루족'은 경제적으로 자립했지만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집값을 내며 함께 사는 젊은 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이번 신조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 차례 자립을 했다가 능력이 닿지 않아 본인, 혹은 본인

 

의 가족을 이끌고 부모 세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젊은 세대를 이르는 '연어족'이라는 단어도 인터넷 상에

 

서는 분명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신캥거루족'이나 '연어족' 가운데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이

 

들은 따로 '빨대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취업 후에도 부모에게 물질적으로 기대어 사는 샐러리맨을 이르는 '찰러리맨'도 이러한 흐름 위에 있는 단어일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단어의 조어 원리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여 검색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 찰거머리의

 

'찰'자와 샐러리의 '러리'를 따다 붙인 말이라고 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시도에 피식하고 웃음을 짓다가, 그 단어

 

가 내포한 시대적 단면을 생각하면 얼굴이 얼어붙는다.)

 

 

 

이들이 1차적으로 기대게 되는 부모 세대 또한 일반적인 특성을 공유하지 않을리 없다. 대표적인 단어가 맞벌이

 

하는 자식들 때문에 손주와 손녀들을 키워주다 생기는 정신, 건강 상의 문제점을 표현한 '손주병'이다. 손주병이

 

라는 단어 자체는 이번에 처음 보았지만, 이 현상은 30대 초중반이라는 연령의 특성상 내가 주변에서 흔히 보고

 

듣는 사례이다. 우리 또래가 낳은 아이들이 보통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신생아에서 유아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놀이방에 보낼 수도 없고 육아 휴가에는 제한이 있어서 기댈 곳은 부모님 뿐이다. 아무리 재봐도 그 외엔

 

마땅한 수가 없는 탓에 부모님이 육아를 맡아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 부작용도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시어머니한테 육아를 맡겼다가 시누들의 융단

 

폭격 같은 욕설 전화를 받았다든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를 안고 씻고 하다가 어머니의 오십견이 재발했

 

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특히 내 세대에게는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세히 쓰자면 유쾌하지 않지만, '육아비'

 

와 관련한 시비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울러 개인에게 경제 위기는 버는 돈이 적을 때에도 발생하지만, 나가는 돈이 많을 때에도 발생한다. 과도한 지

 

출 내역을 파악할 수 있는 한 척도로 가계 대출을 들 수 있을텐데, 우리 나라 가계 대출의 1, 2위는 생활비와 부

 

동산 관련 대출이다. 이에 관해서는 '카드 돌려막기'라든지 '하우스 푸어' 등의 신조어가 이미 유행한 바 있다.

 

그런데 2012년의 신조어에서는 새로운 지출 내역이 눈에 띈다. 교육이다.

 

 

 

'하우스 푸어'의 조어 원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에듀 푸어'는 교육 관련 지출이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렀

 

다는 현상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한 '에듀 푸어'의 풀이는 '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가난해

 

져 살기 어려운 사람'이다. 교육비의 지출이 과한 정도가 아니라, 그 때문에 '가난해져 살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교육은 이제 내가 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더라도 자식에게 반드시 시켜야 할 무엇이다.

 

적당한 대학을 나와 (혹은 대학을 나오지 않고) 적당한 곳에 취업하여, 가끔은 성실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태하기

 

도 하면서 살아도 삼사십 대의 어느 시점에 서울 근교에 자가 한 채쯤 마련할 수 있다면, 이 정도의 교육열이 있

 

을 수 있을까?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말하자면 제 살을 발라먹일 정도의 과도한 교육열은 결국 부모세대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직접적 투영일 것이다. 이렇게 투자하고 이렇게 노력해야, 다시 그 다음 세대에게 살을 발라

 

먹일 정도까지 겨우 올라올 수 있다.

 

 

 

이런 심리가 반영된 단어 중 하나가 '대전동 아빠'일 것이다. '대전동 엄마'와 함께 쓰이기도 하는 '대전동 아빠'

 

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서울 대치동에 전세를 얻는 부모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는 특히 최근 <중앙일보>가

 

신설한, 강남의 문화, 부동산, 교육 등을 분석하여 싣는 '강남통신' 섹션의 '대치동 사람들' 편을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강남통신'의 지면판은 강남, 서초, 송파의 '강남 3구'와 서울 일부 지역에만 배부된다. 우리집

 

엔 왜 안 들어왔냐고 항의전화를 하면 안 된다.)

 

전통의 은마아파트와 현대아이파크, 롯데캐슬, 동부센트레빌 등 대치동 아파트들의 전세가는 검색해 보면 알 일

 

이다. 게다가 교육을 목적으로 입주한 것이니 이 경우에는 전세금이 끝이 아니다. 대치동 학원가로 흘러 들어

 

갈 학원비와 과외비가 본격적으로 지출되기 시작할 것이며 지역의 학부모들과의 교류 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치닫는 심리를 단지 자녀의 입신양명을 위한 교육열 정도에 한정시킬 수 있을까. 나는 불안을 넘어

 

'공포' 정도가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최근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의 스피

 

치나 퍼포먼스를 준비시켜 주는데 두 시간당 15만원의 수업이 성행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부모들의 인터

 

뷰 결과 반장 경력이 유명 중학에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답이 많았다고 하는데, 여기에 깔린 심

 

리 또한 부성애, 모성애나 과시욕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12 신조어에는 조부 세대의 '손주병', 부모 세대의 '연어족-대전동 아빠' 등에 이어 자녀 세대의 '등골 백팩'

 

과 '스마트폰 계급'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둘 다 생경하긴 하지만, '스마트폰 계급'은 단어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간다. 스마트폰의 기종과 성능에 따라 이용자의 계급을 나눈다는 뜻일 것이다. (갤럭시 2를 쓰는 학생이

 

갤럭시 1을 쓰는 학생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 는 것은 추론할 수 있는데, 경쟁사의 최신형 모델끼리는 어떻

 

게 우열을 가리는 것일까? 출시일 기준일까? 이것은 모르겠다.) 이 단어는 초중고 일반에 걸쳐 사용되는 듯 하

 

다. 

 

좀 더 충격적인 것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만큼 비싼 책가방'이라는 뜻의 '등골 백팩'인데, 이 단

 

어는 주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중고생들의 '노스페이스'처럼 특정 브랜드가 정해져 있

 

을까 싶어 더 검색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기사의 형태로 발표된 신조어 가운데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트위터 활동이 활발하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외수 선생을 가리키는 '트통령'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도 해당 자료 수집 기간 동안 있

 

었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에 대한 이외수 선생의 반응을 맥락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국립국어원에서 의도적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면, 대체의 신조어에서 읽혀지는 심리는 '자조'와 '불

 

안'이다. 알고 있던 것이지만 다른 방향으로 확인하니 한층 더 씁쓸하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귀에 딱지가 앉

 

은지도 한참인데, 다른 나라도 이럴까? 이렇지는 않아도 이 정도일까? 각국의 신조어들을 조사하는 연구가 있으

 

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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