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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2

<붉은 돼지>, Savoia S.21

 

 

 

 

 

 

 

 

해묵고 때지난 생일 선물로 모형 비행기 Savoia S. 21을 받았다. 갖고 싶다고 생각한지는 십오 년 쯤, 이 선물을

 

이로부터 기약을 받은 것도 수 년 쯤 됐다. 이천 년대 초중반의 어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Savoia S.21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92년 작 <붉은 돼지>에서 주인공 돼지인 마르코가 타는 비행정이다. 위키백

 

과에 의하면 1920년대에 실존하였던 비행정을 참고하였다 한다. 밀리터리나 애니메이션에 관한 여러 블로그를

 

찾아보니 실제 모델 그대로라는 의견도 있고, 애당초 가상의 모델이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에 맞

 

게 변형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사랑하는 기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싶긴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그 모양대로 나와준 것만으로도 아무려나 좋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왕부터 중년의 남자와 비행정이 나오는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연장

 

선상에서 그는 <비행정시대>라는 단편 만화를 그리고, 이 세계관이 발전하여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붉은 돼지>

 

가 탄생하게 되었다. <붉은 돼지>에서 돼지는 주인공인 마르코 뿐이지만, <비행정시대>의 원화를 보면 파일럿

 

들이 모두 돼지로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 오른쪽에 서 있는 인물이 아마도 이후 마르

 

코의 디자인에 반영된 듯 하다.

 

 

 

 

 

 

 

 

 

 

 

 

 

 

192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 지중해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인근의 아드리아 해라는 공간적 배경, 인기 만점의

 

파일럿, 발달하는 항해 기술과 같은 설정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마도 벨 에포크 시대의 이미지를 떠올리

 

고 있었던 것 같다. 곧, 무슨 이야기가 됐든 결국 테마는 '낭만'이라는 것일 터이다. 위의 원화 한 장 만으로도 그

 

의지는 잘 전달된다.

 

 

 

 

 

 

 

 

 

 

 

 

 

 

<비행정시대>는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일본어로 된 만화도 구할 수가 없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비행정시대>에서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이었던 주인공의

 

비행기는 <붉은 돼지>에서 비행정이라는 한층 더 매력적이고 낭만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비행정이 Savoia S. 21. 그 안에 앉아 있는 파일럿이 주인공인 마르코, 일명 'Porco Rosso(붉은 돼지)'이다.

 

작품 내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설정에 의하면 마르코는 이탈리아 공군 파일럿으로서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바 있었다. 그 곳에서 절친한 전우를 잃고 전쟁의 참상을 겪은데다, 전후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이

 

탈리아 전역을 뒤덮자 마르코는 이러한 모든 것에 혐오를 느끼고 돼지가 되어 아드리아 해의 무인도로 침잠해

 

버린다. 공군에서 퇴역한 뒤 그가 생업으로 삼은 것은 아드리아 해에서 납치와 약탈을 일삼는 공적(空敵)들을 소

 

탕하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그 실력을 두려워 한 공적들이 빨간 비행기를 타고 나타나는 그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Porco Rosso(붉은 돼지)'였다.

 

 

 

 

 

 

 

 

 

 

 

 

 

 

마르코가 사는 무인도는 밖에서 보면 마치 화산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하늘을 향해 거대한 구멍이 뚫

 

린 형태이다. 여기에서 마르코는 비행정을 세워두고 와인을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다가 라디오를 통해 공적들의

 

납치나 약탈 소식이 전해지면 출격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에는 곳곳에 낭만이 숨어있지만, 그 가운데 중년 남자의 한적한 오후를 보여주는 이 컷은 어떤

 

낭만의 장면에도 뒤지지 않는다. 곧 지중해의 하늘을 가로지를 비행정이 가볍게 떠 있는 모습이나, 둥둥 뜬

 

드럼통 위에 널판지를 얹어 탑승로를 만든 것, 와인이 있는 탁자에 턱하니 올려둔 발 등 그야말로 낭만의 지뢰밭

 

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비행정을 소개하는 것이라 줄거리나 캐릭

 

터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받은 모델은 1/72 사이즈.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한 뼘을 조금 넘는 정도이다. 무척 작고 또 얼핏 보기에

 

도 딱히 부품이 많지 않아 조립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 이 모형을 받고 내가 크게 기뻐했던 이유는 바로 도색

 

때문이다. 프라모델을 샀을 때 기본으로 들어있는 부품의 재질과 색은, 폭력적으로 말하자면 어렸을 때 문구점

 

에서 사던 백 원 이백 원 짜리 로보트 조립식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런 칠도 하지 않고 그저 부품을 척

 

척 끼워놓기만 하면 영화를 추억하는 데 있어 인도자라기보다는 학살자의 역할을 더 충실하게 행할 것이다. 그

 

렇다고 미술 점수를 미 이상 받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 대공사에 착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그나마 평

 

소 애니메이션과 프라모델에 일가견을 보여 왔던 오늘의 제작자, 선물을 준 이에게서 기약을 받아내었던 것이

 

다.

 

 

  

 

 

 

 

 

 

 

 

 

 

제작자 김 선생의 작품 활동 모습. 김 선생은 나와의 해묵은 기약을 보다 완성도 있게 지켜내기 위하여, 구청에

 

서 행해지고 있는 프라모델 도색 수업을 신청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내 생일 선물이자

 

김 선생이 정식으로 받은 도색 수업의 첫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의 제작기는 김 선생의 블로그에 보다

 

생생하고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하여 탐독해 보도록 하자.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제

 

작기의 첫 페이지로 이동하게 된다. 다른 카테고리에도 언어학자이자 인문학자인 김 선생의 여러 면모가 곳곳에

 

드러나 있으니 시간을 좀 더 투자하여 휘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http://shingak.tistory.com/132

 

 

 

 

 

 

 

 

 

 

 

 

 

 

프라모델 박스 모습. 돈을 내면 이토록 아름답게 추억이 리모델링될 수도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것이니, 오늘 하루

 

쯤은 자본주의에 머리를 조아리고 제의의 춤이라도 추어야 하겠다.

 

 

 

 

 

 

 

 

 

 

 

 

 

 

개별 부품들을 도색하는 과정. 가운데의 제일 큰 부품이 비행정의 밑바닥인데, 저것이 한 뼘보다 모자란 정도이

 

니 나머지 부품들을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정성스럽게도 차곡차곡 쌓인 부품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콕핏의 계기판에는 속도계는 물론 각종 부품들까

 

지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작품을 완성하려면 기체의 윗부분과 밑바닥을 붙여야 하기 때문에 나도

 

사실 내부는 사진으로만 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이해한 만큼만 알기 쉽게 전

 

달하자면. 원래의 프라모델 부품에는 도색이 잘 먹히지 않기 때문에 사포로 곱게 갈아주고 그 위에 색이 잘 먹을

 

수 있는 바탕 도료를 더 칠해 준다고 한다. 그 바탕 도료의 색이 흰 색인 듯. 김 선생에 따르면 이 바탕색은 최소

 

6회 이상 뿌려 주어야 한다고 한다. 더 궁금한 분은 김 선생의 블로그를 찾아서 배워 보자.

 

 

 

 

 

 

 

 

 

 

 

 

 

 

원작을 잘 몰랐더라면 위의 빤딱빤딱한 흰 색도 그런대로 멋진 색이라 생각했겠지만. 빨강은, 어떤 이에게는 세

 

배 빠른 속도일 테고 어떤 이에게는 마드리드의 클럽이래도, 내게는 오로지 <붉은 돼지>의 추억이다. 고려대의

 

색이도 하고 새누리당의 색이기도 하지마는 오늘만은 어쩔 수 없다. 빨간 색을 위하여 제의의 춤을 다시 춘다.  

 

 

 

 

 

 

 

 

 

 

 

 

 

 

모든 도색을 마치고 조립 직전. 때깔이 선연하게 달라졌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제작자 김 선생과 도색 선생님이 함께 찍은 완성품의 사진. 구도 한 번 끝내준다. 저 날렵한 엉덩

 

이 좀 봐.

 

 

 

 

 

 

 

 

 

 

 

 

 

 

역시 멋진 모습. 배경으로 사용된종이의 뒷면인 듯,  비쳐서 나타나는 '장산 오색단풍 여행'이라는 글자를 발

 

견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정면 샷. 틈만 나면 필리핀에 가서 경비행기 운행을 즐기는 진중권 교수의 블로그 이름이 'Porco Rosso'인 것

 

이해가 간다. 이 선에 홀딱 반하지 않을 재주라면 정말이지 대단한 재주다.

 

 

 

 

 

 

 

 

 

 

 

 

 

 

위에 올린 예술사진들 만으로도 선물 자랑은 충분하지만, 새로 받은 사진 어플로 만지작거리다 찍어 본 이 컷

 

크게 마음을 움직여 굳이 끝에 한 장 더 덧붙인다.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에서 몇 달째 버티고 있던 앙코르

 

트 기념사진을 밀어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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