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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하늘





나는 고심을 하고 있었다.


학교의 수업은 모두 마쳤고, 민추도 종강을 하게 되는 금요일의 새벽이었다. 4학기에는 논문 주제

탐색을 해 보겠답시고 3학기로 몰아 넣었던 네 개의 수업이 각기 기말 과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게

다가, 다음 학기 등록금의 밑천이 될 삼백여만 원의 장학금이 걸려 있는, 지난 중간 고사에서의 실

점이 크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의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해야 하는, 민추의 기말고사가 다음 주였던

것이다. 주 전공이 아닌 소설 수업들의 기말 과제는 마치 형식상 별거지만 실제로는 이혼한 것과 같이

마음 속에서 과감하게 떠나 보낸 후였음에도 남은 과제와 일은 적지 않았다.


이것뿐이라면 마음의 병은 고뇌이지 고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머리를 싸쥐는 건 민아의 결혼식

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십여 년의 교제를 해 온 민아는, 방황하거나 유유자적하는, 통괄하여 대체로 내가 딱히 하는 일 없

이 인천의 집에서 빈둥거리던 때에 언제나 큰 힘이 되어 주던 친구였다. 그 마음씀씀이는 장강하해

와 같아, 만취했다 하면 새벽 세 시고 네 시고 일단 전화통부터 붙들고 보는 주사 탓에 주위에서의

민원을 사람마다 적게 잡아도 서너 차례 이상 받은 나임에도, 민아에게서는 단 한 차례의 꾸짖음

도 들은 기억이 없다. 물론 당신께서도 일정한 직업 없이 20대의 꽤나 긴 시간을 보내신 탓이 가장

크겠지만, 설사 숙면을 방해한 뒤라 하더라도 민아는 절대로 잔소리를 하거나 먼저 전화를 끊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만 가지 주제의 일장 연설을 듣는 와중와중 내 취했을 때의 발성은 아주 훌륭하다는

등의 리액션으로 취객의 가슴을 아스라히 적셔주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심이 됐다.


술자리는 고사하고 외솔관 앞에서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후배들과의 고민상담도 마다하고 매달렸

건만, 동시작업을 허락하지 않는 용렬한 재능 탓에 일과 공부는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못하던 터였

다. 특히 지난 중간고사에서 내 발목을 격심하게 잡아 채었던 논어를, 시험 5일 전이 되도록 한 자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크게 걸렸다. 사실은, 정말로 사실은, 새벽 안개를 헤치고 하교하며

나는 푹 자고 일어나 논어를 끝내자,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루 안에 논어를 마치면,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계산이 안 서는 이 보름 여의 뻑뻑한 기말 행군이, 조금은 미끌미끌해질 것 같은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문의 언덕을 내려가, 편의점에서 빵을 사고, 샤워를 마칠 때까지 나는 계속

해서 '자고 일어나 연구실 간다. 자고 일어나 연구실 간다'를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

와, 불을 끄고 누워 눈알을 굴렸다.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아다 문자함을 뒤적거리는데, 민아의 문자

가 나왔다. 나는 한참 전화기를 쳐다 보다가 에흉, 하고 콧소리를 내며 넉넉하게 잡아 두었던 알람

시간을 당겼다.


오후에 일어나 연구실로 가, 인천에 오고가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읽으려 논어집주를 챙겼다. 읽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챙겨 가고서 안 읽었을 때의 자책과, 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챙기지도 않았다는 정신 상태에 대한 자책을 비교해 보면,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막심할 것을

내다 보고 한, 괜한 짓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순서대로 꽂혀 있던 할 일들의 시선이 따가워

견딜 수가 없어 카메라를 들고는 조금 일찍 민추로 나섰다.


중간환전소인 세검정 초등학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동시간은 몇 시간, 집에 들르는 시간은 몇 시

간, 예식과 식사는 몇 시간 등을 계산하고 있는데,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휙 불어 이마를 때렸다. 고개

를 들어 보고는, 멍하니, 들고 있던 소학 집주와 논어 집주를 아스팔트에 내려 놓고, -그러나 중앙 도

서관에서 빌린 소학집주를 내 돈 주고 산 논어집주 아래에 순서시킴은 잊지 않고- 가방을 뒤져 카

메라를 꺼내어 몇 장을 찰칵찰칵, 찍었다. 갠지스 강에서 일몰을 찍던 그 때처럼, 눈앞의 모든 사물

들이 다 자기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 같고, 그 선 하나하나를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모두 그려낼

수 있을 것 같고, 손을 뻗으면 모두 한 번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씩 웃고, 삼백만 원 같은 거, 개나 줘 버리라지, 하고 뇌까리고는 야참은 카레가 좋겠다고 엄마

한테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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