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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하기 싫은 숙제

학부의 마지막 기말시험 세 과목 중 두 과목을 마치고 내려왔다. '우리말 연구의 첫걸음'은 사상 최

악의 무방비상태. 하다 못 해 마교수님의 기말시험을 보러 갈 때조차 적어도 시집 한 권 정도는 읽고

갔던 것인데. 아무튼 지나간 건 지나간 것이고.


몇주째 고민하고 있는 기말 레포트 두개가 말썽이다. 하나는 너무 쓰기 싫어서, 하나는 너무 잘 쓰고

싶어서. 적어도 공부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스스로의 실력이 부끄럽기도 부끄럽거니와 혹여 부

끄럽지 않은 부분이라도 나중에 어디서 책잡힐까 두려워 최대한 언사를 조심히 하는 편인데, '영화

문학론' 수업만큼은 입에서 불평이 끊어지질 않는다. 교재에 선택된 논문의 질부터 수업진행방식과

토론자-논문작성자로서의 교수의 자질에 대한 의문까지. 기말 레포트의 주제는 '영화와 관련된 문

학에 대해 쓰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좋다'이다. 자료집의 논문에 대해 감상 및 비평을 적는

세차례의 숙제에서 수준 미달의 논문들을 자근자근 난도질하여 비판했다가 예의 교수로부터 지적

을 받은 일이 있던 나는 어디 하나 책잡히기 싫어 기말 주제 기획서에 세개의 계획을 올렸다.

'희곡 <날 보러 와요>의 시나리오화 - <살인의 추억>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형상화와 작가 봉준호론'

은 식상하다고 퇴짜. '<우아한 세계>를 통해 보는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보편적 아버지상과 칸노

요코의 음악이 전체 서사에 미치는 영향'은 관련 논문이 없고(!) 음악은 수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퇴짜. 결국 통과된 것은 '시나리오 <라디오의 시간>의 극화과정과 실제상연 경험'. 그나마

이 주제도 관련논문이 없다고 퇴짜를 맞을 뻔 했다. (국내 극화가 내가 처음인데 논문이 없는게

당연하지! 관련논문이 있으면 식상하다고 퇴짜맞고 없으면 없다고 퇴짜맞고. 세상에.) 시나리오와

희곡상의 차이점을 제시하고 공연시의 관객반응과 연출로서의 체험에 관한 술회를 적는 것이 주

가 될 것이기 때문에 관련논문이래봐야 연극문법이나 영화문법에 관한 원론적 이야기 한두줄의 인

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항변해 보았으나 그러면 그 한두줄을 인용할 책이라도 요약해 와, 라는

말로 내쳐졌다. 쓰나 안 쓰나 하는 말을 적기 위해 책 한 권을 요약하라는 그 의도가 도대체 무엇입니

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도무지 논의가 끝날 것 같지 않아 참고 말았다. 아무튼, 그 숙

제를 해야 한다고. 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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