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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폴라로이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인가 뭐 그 비슷한 카피를 단 디지털 카메라 선전이 있었다. 하도 봐서

그런지 디지털 카메라라면 김민희가 나와서 예의 그 어벙벙한 얼굴로 한껏 도도한 척 하고 있는 장

면밖에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 제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야, 사진 참 못 나왔다라고 박장대소를 했던 사진을 몇년이 지나 꺼내었을때, 못 나왔다고 웃었던

그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그는 예전에 못 생겼던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면 싹이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


우리 집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하나 있다. 영화 '접속'에서 한석규가 혼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 걸 보고 댑따 멋지다고 생각해서 꼭 한 대 있었으면 했는데, 어느 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 중의 한 분이 어딘가의 경품으로 받아 왔다. (어머니일 공산이 크다. 아버지는 그런거 안

하시거든.)


수차례 언급하건대 나는 촌사람이다. 폴라로이드라는 물건이 전기로 돌아가는 건지 한 번 쓰고

나면 더이상 못 쓰는 일회용인지도 모르고, 필름이 들어가는지 테이프가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 더, 진정한 촌사람답게, 모르는 건 안 건드린다.


그런데 얼마전 방을 정리하다가, 알 수 없는 사진을 찾아냈다. 한석규가 하듯 혼자 카메라를 들이

대고 올려다 보는 얼굴로 찍었고(그렇다. 속칭 '하두리각도', 좀 더 쉬운 말로 '캠빨 각도'라고 불리

우는 그 샷이다.), 밑의 하얀 공간에는 멋져주게시리 '온수, 2001'이라고 써 놓은 폴라로이드 사진.

지하철 밖으로는 눈이 펑펑 내리는데 창문으로는 햇살이 비치고 있고, 뒤로도 사람들이 보이는데

평소의 나답지 않게 카메라를 보고 씨익 웃고 있는 것이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사대주의

다!라고 비난하면 할 말 없다- 마치 유럽의 어느 지하철인양 묘릇묘릇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치

어느 사진작가가 장난으로 찍은 척 하면서 만든 작품인 것만 같았다.


언제 찍었는지, 뭔 바람이 불어 찍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도 그런건 어느새인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흠, 표정으로 보아하니 2001년은 행복한 해였나 보군하는 만족감만이 남았다.


폴라로이드 사진이니 몇년 지나면 다 날아가 버리겠지, 언젠가 스캔해 둬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전날 새벽까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아져 있던 사진이 없어졌다.

가족들도 모르는 일이라 하고, 사진에 발이 달려 장판 밑으로 쑤시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바닥도 들어내 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요새는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게 많은가 모르겠다. 폴라로이드. 폴라로이드. 그것도 기억이랍시고.


-폴라로이드는 제품명이 아니라 제일 유명한 회사 이름이다!라고 계속 생각하는 거기 당신, 호치케스

랑 스태플러로 머리 양쪽에 핀이라도 꽂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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