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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콧물이 주룩주룩

며칠째 떨어지지 않는 감기에 코가 헐도록 팽팽 풀어대고 있다.



오늘은 묘한 전화를 받았다.

국어국문과의 졸업학기 학생임에도 학부 생활 중 어학 수업은 단 하나, ‘우리말 연구의 첫걸음’만을

들었다. 사실 이번 학기에 듣는 중이라 아직 수료도 아니다.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가 없는 필

수과목이라 억지로 듣는 수업이기 때문에, 내게는 첫 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인 셈이다. 대가다운 풍모

의 임용기 선생님은 우러러보게 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어학이 요구하는 덕목인 논리력과 과학적 사

고를 배양하는 데에 있어 나는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 하겠다. 아무튼 수업에 흥미를 못 붙이다 보

니 수업의 구성원들에 대한 애착도 바닥이라 조모임의 조원들조차도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었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주인은 그 중의 한 명이었노라 자신을 소개하였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끊을 때쯤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예의 학생은 ‘우리말 연구의 첫걸음’이 아니

라 생각지도 못 했던 ‘예술기획경영’ 수업에 관해 상담을 청해 온 것이다. 세상에. 지옥의 예기경.


반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당시의 조원이었던 경은양, 지수양과 연락을 지속하며 이따금 그 때를 추

억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며 웃곤 하였다. 올해에는 연다 페스티벌이 -지난 학기의 성공적인 개최

에 힘입어- 이틀로 연장되었다는 얼마 전의 소식에 정말 눈물이 나도록 웃어대었던 것인데.


학생은 울듯한 목소리로, 내일이 연다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 왔다.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자주 언급하셔서요.

뭐라고 하십디까, 너무너무 잘 했다고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내일이 연다인데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입니까, 너무 막막해서 전화해 봤어요.

그렇군요, 딱히 다른 질문이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없어요.

네.


우습게도, 이 이야기가 재미를 위한 허구로 여겨지면 어쩌나를 걱정할 정도로 우습게도, 나는 그 통

화를 마치고는 길을 걷다가 몇 달만에 허정아 선생님과 떡하니 마주쳤다. 선생님은 반색하시며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하셨는데, 방금 전의 통화로 미루어 보아 분명 연다에 엮어 넣으려는 제안일 것

이 틀림없다고 직감한 나는 얼른 다른 이야기를 찾느라 허둥대었다. 이 때, 함께 했던 여러 학기 중에

서도 이번 학기에는 유난스럽게도 서로 마주치는 일이 적었던 Bon Voyage의 선장 신각군이 어슬렁

어슬렁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좀처럼 영탄조의 어미를 쓰지 않는 나로서도 자연스레 느낌표를

토해낼 만한 상황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 마침 연다에 관련하여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신각

군의 말에 허 선생님은 제안의 봇물을 터뜨릴 곳을 만나 폭발하셨다. 큰 파랑을 넘긴 나는 겨우 안

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신각군, 능력이 많아도 피곤하군. 쓸모없는 분야가 한두개가 아닌 나는 즐

거운 패배감을 맛보고 있었다.


이 일을 실시간으로 즐겁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제때 받는 법이 없는 현직 인

턴 겸 예비 계절학기 수강생 지수양은 또 몇시간 뒤에나 전화를 걸어 왔다. 듣는 내 다리가 휘청할

정도로 무기력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말한 지수양도 전화를 끊을 때 쯤엔 역시나 나처럼 대폭소

를 터뜨리고 있었다. 성공적 개최였다는 지난 연다 페스티발에 대한 평가에 지대한 공적을 쌓은 미

각팀 치프 매니저 지수양. 즐거울 만도 하지.


경은양과 지수양을 아직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만 해도 일기에 올리기 흐뭇한 것인데, 예기경까지 묶

어 또 한 편의 에피소드를 적게 되다니. 정말, 여러 사람 잡는 예기경이다. 경은씨는 아직 통화가

안 되었는데, 무슨 반응을 보일지. Bon Voyage의 보이지 않는 손 이경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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