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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최중식 씨.

아버지는 56년생이다. 아버지에게도 나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 아버지의 삼십

대 후반부터였으니 이제 십여년이 되어 간다.



엄마가 약속이 있어 나간 사이, 과외를 가기 전에 집에서 혼자 오락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집으로 전화한 것이 아니라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나 주려고 구두를 한 켤레 샀으니 집에 있으면 나가지 말고 잠깐 있으라는 말을 했다. 어제 사 들고

왔던 남녀 세트 향수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아직 덥지도 않은데 직직 끌고 다니는 샌들이

눈에 밟혀서였을까.



대가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아버지가 사 주는 신발은 별로 마음에 드는 적이 없었다. 슬쩍 가서 바꿔

오기도 하고, 신발장에 넣어 놓고 안 신기도 하고.



...신발장이라는 것이 어디 집 한 쪽 구석에 있어서 한달에 한 번 정도나 스윽 들여다 보는 데도

아니고, 하루에 적어도 두번은 보는 곳인데. 아버지는 바뀌었거나 먼지가 쌓인 신발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스무살이 훨씬 넘은 어느날에 신발장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까지,

나는 그것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이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촌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촌사람이다. 나는 이제껏 아버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잘했다고 크게

칭찬을 들은 기억도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재수하고 있는 곳을 둘러 보고서는 엄마보다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버지의

등을 기억한다. 연세대 합격발표를 들고 왔을 때 손뼉을 치는 엄마의 뒤에서 웃음을 참고 있던

아버지의 부자연스런 입모양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내가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을 잠시 보고 있다가는 다시 나갔다. 문을 잠그고 맨발에 신겨

져 있는 신발을 쳐다 보다가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신발이 너무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