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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최은서






아버지는 칠남매라 내게는 사촌이 열다섯 명 있지만, 다른 집들에 비하면 유달리 사촌간의 관계가

없었다. 평생 만난 횟수를 합해 봐야 열 번 안짝인 사람도 있고, 가장 친한 사람을 굳이 뽑으라고 해

도 집안의 큰 일 때나 잠깐 만나 존대말 비슷한 반말로 근황이나 묻는 정도였다. 최씨 성을 단 친사

촌들과는 그래도 방학마다 만나 큰 집이 있는 시골에서 뛰어 노는 유년기를 함께 보냈는데, 그나마도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인생이 다르고 화제가 다르다 보니 제사 때나 잠깐 보고 말 뿐이었다.


두어달 전 인천에 잠시 내려왔다가 나와 세 살 터울인 운호 형이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큰고모의 장남인 태훈이 형이 아들을 낳은 것이 이십수년 전의 일이다. 집안에는 이미 다음 대의 아이

들이 즐비하였다. 집안의 화목을 중요시하는 아버지는 형수가 몸을 풀고 있는 요양원에 굳이 인사를

다녀오라고 시켰는데, 동생이 승용차를 태워줬고 엄마와 동행하는 것이니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

던 것이지 혼자 버스 타고 가라고 했으면 애당초 나설 길이 아니었다.


형수와는 인사왔을 때와 결혼할 때 두 번 만났을 뿐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길에서 스

치면 서로 모르고 지날 사이인데, 그런 말같은 도련님이 둘이나 닥치자 환자복을 입은 형수는 황망

히 어질러진 이부자리를 치우며 힘겹게 일어났다. 앉아서 뭘 해야하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아기를

봤다.


조카가 많은 나는 독서 등이 아닌 시각체험으로 알고 있다. 난지 이삼일 째의 갓난아기는 뻘겋고 쭈

글쭈글해서 빈말로도 예쁘다고 하기 힘들다. 그걸 감안하고 봐도, 결코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나는

외탁이지만, 최씨들은 뚜렷한 눈매와 입매, 날렵한 콧날 등 대체로 좋게 평가해줄만한 외양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아기의 얼굴에는 두툽두툽한 형수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너

무 귀엽고 예뻤다. 입이라도 오물거리거나 사지를 써서 버둥거리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안아올리

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추석에 만난 아기는 은서라는 이름을 달고 왔다. 사람들의 손을 한차례 타고 난 뒤, 고스

톱 치러 갈 사람은 고스톱 치러 가고 일하러 갈 사람은 일하러 간 후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나는 아기

를 품에 안아보았는데, 아기는 눈동자를 굴려 내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벙긋, 웃고는 내 가슴팍

을 쥐며 더욱 안겨들었다. 명치있는 데가 뜨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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