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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청첩장

강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편함을 보니 아버지 앞으로 청첩장이 한 장 와 있었다.


구월에는 주말마다 결혼식이 하나씩 잡혀 있는 탓에, 공부하는 티 낸다는 소리 들을까 두려워 미용

실을 찾아 덥수룩해진 머리를 짧게 잘랐다. 연예인들의 이혼 경향에 관한 원장님의 시덥잖은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며, 지금 결혼하는 친구들이 또래 중에서는 약간 빠른 편이니 해마다 구월이 되면 이렇

게 머리를 또 잘라야 하는 것일까 등의 생각을 했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머리를 자르고 난 며칠 뒤, 승호의 결혼식 전에 마지막으로 모두 함께 만나 무슨 선물을 사 줄지, 웨

딩 카의 운전은 누가 할지 등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승호의 청첩장을 건네 받았다. 데면데면한 사이

인 지인들의 결혼식에는 수 차례 참석해 왔지만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에는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는데,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을 보자 어쩐지 찡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 자르길 잘 했다,

라는 생각도 했다. 영광된 첫 사회의 중임을 맡게 된 홍기는 그때까지도 머리를 자르지 않아 많은 이

들의 우려를 자아냈었다.


강독회가 끝나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소주를 한 병 가량 마셨던 탓에 소파에 벌렁 누워 쉬고 있는데

외출했던 부모님이 돌아왔다. 아빠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엄마는 청첩장 봉투를 열어 뒤적거리

더니 얘, 승호가 네 친구 아니니? 하고 물어왔다. 받아들은 청첩장은 몇 주 전 직접 건네받은 그

청첩장 그대로였다. 직접 줬으면 됐지 뭘 또 부쳤을까 생각하다가 아빠의 이름은 어떻게 알고 그

앞으로 부쳤을까가 더 궁금해졌다. 내 생각을 들은 엄마는 그러게, 어떻게 알았다지, 하면서 아들

의 친구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들여다 보다가 어머, 신부네 아버지가 아빠 동창이야, 라고 말했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짓자 엄마는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오늘 아침에 친한 동창 딸이 구월 첫째 주에

시집간다고 그러던데, 라며 연방 감탄사를 발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아빠도 청첩장을 보고는

이 승호가 네 친구 승호가 맞느냐며 신기해 하다가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뚱하니 그러

마고 하고 잠시 누워 있다가 승호에게 전화를 걸어 있었던 일을 신이 나서 쫑알쫑알 떠들었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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