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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주먹밥의 정체






인터넷에서 뽑아가지고 간 자료를 보니 '봄날은 간다'에서 주로 나온 장면은 대나무숲이 아니라 신흥

사내의 풍경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이라고 되어 있었다. 괜한 헛걸음 했네, 하고 어쩔 수 없이 주먹밥

군의 괄약근을 관찰하며 내려오는 길. 다시 신흥사 입구로 길을 잡아드는데 주먹밥군이 대뜸 절내

로 뛰어들어갔다. 성당안에서는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는 나는 의외로 절에 약해서 야, 이놈아, 안돼

안돼하며 따라갔다. 스님이 옆에 개를 데리고선 절에 들어오면 어떡하냐고 다그치면 어쩌지 하고 들

어섰는데, 웬걸. 주먹밥군은 그 절에서 사는 개였다. 버젓이 집도 있고 낮잠을 자는 곳도 있는.


산중.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햇살은 대웅전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비추며, 이따금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풍경들의 희미한 소리만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산들바람. 기막힌 절경 앞

에서 찬탄의 소리를 내지르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안온한 풍류 또한 살면서 몇차례 누릴 수 없는

호사라고 생각하였다.

그 와중에,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난 매일 그 호사를 누린다네라는 듯이 또아리를 틀고 낮잠에 빠져

든 주먹밥씨. (어느새 호칭이 높아졌다.) 자는 품새도 과연 범상치 않아 보통 개들은 정신 똑바로 차

리고도 하기 힘든 꼬리물기를 잠자면서도 가볍게 하는 저 위용. 그저 동네개정도로만 여겼던 주먹밥

군은 산행을 통해 닌자견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절의 주지견이신 주먹밥씨로 훌쩍 이미지를 높인 것

이었다. 주무시는 모습과, 대웅전 옆 건물의 벽에 그려진 호랑이의 모습이 한순간 겹쳐보여 문수보

살의 화신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너무 늦기 전에 서울에 도착해야 했기에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주무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살짝 일어났지만 주먹밥님은 다 예상했다는 듯이 눈을 슬쩍 뜨더니 우리를 입구까지 마

중해 주었다. 속세와 신흥사의 갈림길이었던 그 다리까지, 정확히 그 다리까지 우리를 배웅해 준

주먹밥님은 잠시간 우리의 뒷모습을 지켜 보다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쩐지

한숨을 크게 쉬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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