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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일요일 오후

과외에 가기 전에 부모님이 백화점에 들러 여름바지를 사 줬다. 해가 갈 수록 예쁜 옷을 골라내는 데

에 둔감해지는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 조금 한심해 했다. 진모

형만큼 신경쓸 것 까지야 없지만 깔끔하게는 입고 다녀야 할텐데. 원, 영 신경 안 쓰인단 말이야.


옷을 사러 가는 길에 백화점 앞에 있는 건널목에서 색깔 있는 비비탄을 주웠다. 색깔 비비탄을 주

운 날과 그 뒤의 며칠간에는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은 내 오랜 미신이다. 게다가 이번엔 남색이었다.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남색. 그래서 바지도 남색 면바지로 골랐다.


과외집 근처의 지하철역에 도착한 시간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백화점에서부터 늦지 않을까 종종친

걸음덕분에 정작 과외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는 평소보다 십여분이나 이른 때였다. 뭣 좀 할게 없

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오늘도 뽑기를 했다. 오늘은 어처구니 없는 걸 뽑고서는 기분 나빠지는 것이

싫어 뽑기 기계가 온통 얌체공으로만 채워져 있는 100원짜리를 했다.


비교가 될까는 모르겠지만, 주머니에 있는 백원짜리 일고여덟개를 미친 듯이 집어 넣고 돌리며 스트

레스가 생기면 쇼핑으로 푼다는 여자들의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아, 거 손맛 좋더구면.


공이 떨어지는지 어떤지 보지도 않고 마구 돌려대다가 백원짜리를 다 쓰고 트레이에 잔뜩 쌓여 있

는 얌체공을 집기 전에 잠시 허리를 쫙 폈다가 깜짝 놀랐다. 돌리는 소리가 요란해서였는지, 아니면

미친 듯이 돌려대며 잇힛힛하고 웃고 있었던 내가 신기했는지, 아니면 그냥 덩치 큰 어른이 뽑기를

하고 있는 것이 한심했는지 동네 꼬마들이 우루루 몰려 서 있다가 내가 갑자기 허리를 펴자 와아 소

리를 질러 버린 것이다.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고서는 내가 더 놀랐다, 이 놈들아 하고 말하자 아이들

이 왁 웃었다. 아이들이 내 두 손에 넘치게 담겨 있는 얌체공을, 정말로 동화책에 나오는 삽화처럼

손가락을 물고 쳐다 보고 있어서 이거, 줄까하고 물어보자 한 놈이 눈치를 보다가 얏!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하나를 훔쳐서 팔락팔락 도망갔다. 원, 빨리나 뛸 것이지. 터벅터벅 뒤따라가서 뒷덜미를

잡자 애가 기절할 듯이 놀래길래 달래 주려고 얌체공 하나를 더 줬다. 그 녀석이 혼날 줄 알고 있었

는지 단체로 울 준비를 하고 있던 꼬마들은 나두요, 나두요 소리를 질러대며 주위에 몰려 들었다.

에잇, 하고 운동장쪽으로 몽땅 집어 던지자 아이들은 와악 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한 예쁘

게 생긴 꼬마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져서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울고 있길래 가방을 뒤적거려서

나온 드라큘라 이빨을 줬다. 이건 이백원이야, 하자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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