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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이양연(李亮淵) .타비 打悲

문을 들어서려다 되려 나와서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대네.  
남쪽 언덕배기엔 산 살구 꽃이  
서편 물가엔 대여섯 마리 해오라비가.  

入門還出門  擧頭忙轉 
南岸山杏花  西洲鷺五六


조선 후기 이양연(李亮淵)의 <타비>란 작품이다. 제목을 풀면 `슬픔을 누르려고`이다.

시인은 왜 문을 들어서다 말고 다시 나갔을까?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이 바쁘게 사방을 두리번

거린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남쪽 언덕의 살구꽃이고, 서편 물가의 대여섯 마리 백로이다. 살구꽃과

백로를 보자고 시인은 문을 들어서려다 말고 다시 나섰던 걸까?


시인이 늘그막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같은 해에 둘째 아들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후 지었

다는 시다. 바깥일을 보고 여느 때처럼 문을 들어서다가 집안에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는 것을 문득 깨달았겠지. 기가 턱 막히고 주체 못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차마 그 문을 들어

서질 못한다. 놀란 듯 뛰쳐 나오고 보니, 열적어서 공연히 사방을 바쁘게 두리번거렸다. 눈물을 막아

보려는 안간힘인게다. 그 눈에 아내의 생전 모습처럼 곱게 핀 살구꽃이 들어오고, 여린 자식 같은 해

오라비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시인은 종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겠

는데, 쓰다 달다 한마디 없이 거기까지만 이야기 하고 말을 끊었다. 곁에 있을 땐 모르다가, 훌쩍 떠

나면 두고두고 가슴 아픈 것이 혈육의 정이다.

                                                                             -출처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아. 아. 과연 한시의 세계는 가함이 없다.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지 앞에서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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