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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우리소설읽기 종강

이번 주가 기말고사라 지난 주에 모든 수업은 종강을 하였지만, 나는 오늘 마지막 수업이 하나 있어

학교로 향하였다.


사실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해져 있었다. 지난 주의 수요일은 현충일, 금요일은 주4파라 원래 수업이

없었던 나는 깊은 고심 끝에 목요일의 수업을 마음에서 떠나 보낸 뒤 화요일 저녁에 대범하게 자체종

강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학기 내 바빠서 찾지 못 했던 도환 형의 자택을 찾아 각종 게임기들

을 껴안고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간 장렬히 자폭해 있었다. 시간이 가거나 말거나, 끼니때가

되거나 말거나, 오락이 지겨우면 만화를 보고 만화가 지겨우면 영화를 보고, 영화가 지겨우면 잠을

자고. 단 5일 뿐이었는데 TV볼 시간조차 없이 분을 아껴 살던 지난 반년간의 이야기가 쯧쯧 하고

혀를 차는 남의 이야기가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런 뒤의, 등교였던 것이다.


긴 엘리베이터의 현대백화점 출구도 어쩐지 제대 후 처음 찾았던 신촌처럼 낯설었고, 고작 5일만에

여름은 바짝 다가와 있었다. 기말고사 대체 레포트의 자료로 삼기 위해 중앙도서관을 찾았는데, 열람

실에 앉아 책을 펴 놓고 있는 학생들이 -바로 일주일 전의 내 모습이었던 데다가 실은 아직 나도 그

안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새로 다운받은 경쾌한 연주곡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며 책을 찾았다.


기실 수업은 아니었다. 감동적인 끝인사와 함께 지난주 종강한 '우리소설읽기' 수업의 교수님이 그간

제출한 레포트에 대해 개별면담을 통한 평가를 해 주시겠다고 한 것이다. 이 수업은 그 주의 커리큘

럼인 소설을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제출하는 숙제가 매주 있었다.


사실 나에게는 현대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감상 또한 중요시하는 고전문학의 한 흐름과는 달리

현대문학에서는 비평을 위한 비평만을 일삼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작가조차 생각하

지 못 했을 법한 작품비평이론을 들고, 그에 맞는 사례를 작품 내에서 조각조각 수집하는 그 행위가

위악적으로 느껴졌었다. 이 수업도 사실 들으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고전문학만으로 시간표를

다 채우려고 했던 시도가 실패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넣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주 비평 숙제라니.

연극공연 때문에 수강변경기간에 수업을 듣지 못 했던 나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그래도 어쨌든 글이니까, 어떻게 써 내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2주 연속 레포트에 B를 맞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달리기 강좌에서 F를 맞았다든지, 수학 수업에서 D를 맞았다든지 하면

나는 크게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면. 현대문학이 그 같잖은 말장난과 용어정의를

빌미로 또 날 물먹이는구나. 열받은 나는 3주째에 되먹잖은 인터넷자료들과 사조이론등을 집어 치우

고 F먹일테면 먹여라 군대도 갔다왔는데 내가 뭐가 무서워서 하는 심정으로 쓰고 싶은 글을 냅다

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 레포트를,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강의하면서 인용하며 선생님은 이런 레포

트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의 개인적 감상과 서정적 감수성이 없는 비평은

결국 비평을 위한 비평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레포트 작성자의 이름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인용

하신 과격하며 외설적인(이 부분에서 내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표현들이 틀림없이 내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숙제에 정을 붙이고 보니 수업에도 정이 들었고, 마침 선생님께서 이번 학기 기획수업과

고전문학수업 등을 아울러, 말하자면 수업과 일상을 아울러 제일 고민하는 문제였던 '개인과 세계

와의 거리'에 대해 언급하시기 시작하면서 가는 길이 즐거운 수업 중의 하나가 되었었다. 이름이나

대충 알던 우리소설들을 약간 밀도 있게 읽어 본 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자체종강까지 하였고 시험은 목요일 금요일에나 있었음에도 월요일에 굳이 잠깐의 개별면담을 위

해 학교까지 간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엄청난 동안과 청량한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은 마지막

면담에서 웃으며 한학기동안 레포트들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을 해 주셨다. 그리고 글재주와 생각

하는 바가 아까우니 공부를 더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건네셨다. 근래 취업과 대학원진학

사이에서 죽어라 고민하고 있던 나는 가슴이 쿵하여 씩 웃었다. 선생님이기 이전에 국문학을 택하여

공부의 길을 걸어간 누나에게 고민들을 징징거리며 늘어 놓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한학기 동안

정붙이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그리고 인생 자체에도 가치있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수업을

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렸다. (진심이었지만, 면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눈에 비친 내 뒤의 학생들의

눈에는 '아부쟁이새끼'라는 글씨가 고딕체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길었던 듯도 하다.)

면담의 끝에 선생님이 돌려 준 마지막 주의 레포트. 점수는 A+, 멘트는 '좋은 글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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