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4

완재 아저씨

아버지의 친구가 죽었다. 자살을 했다니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시골 출신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나는 완재아저씨를 내 나이만큼 봐 온 셈이다. 기억하는 한에도, 만약 그림을 그리

는 손이 나에게도 있다면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만큼 나는 완재아저씨를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당시 사회상으로 보기에도 약간 일찍 장가를 갔고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당시 농촌의 현실

답게 늦게 장가를 간 탓에, 그분들의 자제들과 나는 나이차이가 꽤 난다. 개중 유독 완재아저씨의

딸인 미연이만 누나였다. 그렇지만 완재아저씨는 단순히 아버지보다 일찍 아이를 낳은 단 한 명으로

만 기억하기에는 여러가지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일면도, 심각한 일면도 있었다.


아저씨의 가정생활은 딴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내가 보기에도 그리 평탄치 못했다. 어디까지가 정확

한 이야기인지도 알 수 없어 구구절절이 적을 수는 없다. 그때문일까.


아저씨는 사업을 한차례 했다가 말아먹고 택시를 몰았다. 그러다가 근래 다시 사업을 시작해서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왔던 얼마전에 들었었는데, 그것이 잘 안 풀린것일까.


자살을 택할 때의 아저씨는 내가 어릴때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친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언가

죽을만큼 심각한 고민을 가진, 쉰살의 남자였을 것이다. 스물네살의 남자인 나는, 오늘 여러가지로

있었던 행복한 일들의 끝무렵에 갑작스런 완재아저씨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어쩐지 그 현격

한 차이에 몸서리가 쳐졌다.



서울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보니, 우리동네 만화책방이 망했다. 얼마전 옥션에서 만화책

오만원어치를 샀는데, 거기에서 샀더라면 이만원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분한 마음에 여기에서라도

많이 사서 본전 맞춰야지하고 고르다 보니 백권이 넘게 집어들었다. 서울에서 이리저리 돈을 쓰고

돌아온 터라 현금이 모자라,  이번달 재정을 걱정하며 어쨌든 찾은 동네 ATM, 고장났다. 제길하며

슬금슬금 걸어간 한미은행 ATM, 정말 바로 대여섯걸음 앞에서 불이 툭 꺼졌다. 열두시에 끝난단

다. 책방주인은 열두시 반에 닫는다고 했겠다. 다급해진 마음에 편의점은 밤새 하겠지하고 달려서

찾은 버스정류장 두개쯤의 거리에 있는 LG25. 우리은행ATM은 열한시 반부터 열두시 반까지 기기

점검을 한단다. 한시간동안 생쇼를 했구나하고 젠장젠장하며 들어오다가, 그 한시간동안 나는 완재

아저씨를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않은 것이 생각나 눈을 부릅뜬채로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기장 > 2004'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04.03.27
그냥 쉬어가기  (1) 2004.03.27
역시나 그랬어  (7) 2004.03.24
세상이 퍼즐같다면  (2) 2004.03.22
대호야, 이쪽이야!  (0) 200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