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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영화관람






일어나자마자 소파에 배를 벌렁 깔고 뒹구적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오늘까지가 만기인 영화 예매표

를 건네 주었다. 본래 엄마의 아는 동생과 함께 가려고 했던 것인데, 몸살이 심하게 나 밖에 나가기

어렵게 된 터라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나 혼자 방학 중이지 다른 스물여덟들은 열심히도 살아 가는 중이라 애당초 같이 보러 갈 사람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영화잡지도 관심이 가는 기사가 있을 때에만 사 보게 된지라 근래에는

무슨 영화가 있는지 몰라 검색을 해 보았는데, 그리 보고 싶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가까운

영화관에서는 개봉작 중에서도 고작 대여섯개만이 상영되고 있었다. 두 영화 사이의 시간이 길면

혼자서 할 일이 없으니 시간도 고려해야 했다. 화제작이었던 '원스 어폰 어 타임'과, '범죄의 재구성'

과 '시실리' 때부터 좋아하던 김윤석 아저씨가 나오는 '추격자'를 예매했다.


발렌타인 데이인데도 영화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먼저 시작하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상영관

에 들어가 앉았는데, 총 열댓줄 중에 통로를 기점으로 앞으로 나 있는 네 줄에는 오로지 나만 앉아

있었다. 모양을 낸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긴 했지만 집에서 팬티처럼 입는 옷이라 다소간 민망하던

나는 잘됐다 싶어 다리를 쩍 벌리고 편하게 영화를 보았다.

시나리오는 제법 공을 들인 듯 했다. 보아하니 미술에도 돈이 꽤 들어간 것 같았고. 하지만 남녀주

연배우의 미숙한 연기가 영 눈에 거슬렸다. 스탭 롤을 보면서, 야, 참 저 많은 사람들이 그 긴 시간

과 많은 돈을 들인 작품인데, 고작 두 사람이 망칠 수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여주인공의

연기는 주위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한 것이었다. 리액션은 거의

전무했고 액션도 감독의 디렉션에 따라 움직이려 하는 시도가 역력히 보이는 어색한 것들 뿐이라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활극류의 영화임에도 내내 불편했다. 합이 착착 맞는 연기, 그 호흡에서 나

오는 유쾌함을 주문한 듯한 감독의 의도는 알겠지만 몸에 붙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가 아쉬웠다.

여러가지 개그 신이라든지, 말장난이라든지 잡기에 가까운 아이디어는 군데군데 빛을 발했으나

장면이 변할 때마다 갑자기 바뀌는 인물들의 캐릭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배경음악 등에서 연출력

의 부재가 심하게 느껴졌다.

재미있는 발견은 성동일-조희봉 콤비.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극찬하는 것을 들었고, '빨간 양말'때

부터의 입담을 좋아했던 성동일과 연극 쪽에서 더 이름을 많이 들었던 조희봉이라지만 영화에서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절묘한 캐릭터의 조화와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농익은 연기.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총평하여 C0 쯤의 영화이지만 이 둘만큼은 A급의 장면들을 보여 주었다. 이 영화의 대부

분의 배우들은 연기를 못 하는데도 시나리오와 미술이 건져 줬다고 여겨졌지만 성동일 조희봉은

오히려 시나리오가 죽였다고 여겨질만큼 좋은 연기를 펼쳤다. 앞으로 영화에서 더 많은 모습들을

보게 되길 기대한다.


짧은 막간 동안 근처의 서점을 찾아 두 영화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 읽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에

대해서는 역시 '활극류다. 재밌다. 그게 다다.'식의 평이 대부분이었다. '추격자'에 관한 기사는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배우 김윤석의 비상에 관한 기대등이 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격자'는 하정우의 탄탄한 연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김윤석

의 호연, 뛰어난 조명, 적절한 음악 등의 수많은 미덕들이 있음에도 가장 먼저 굳건한 연출력을 실감

하게 되는 영화였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아마도 실화를 무리하게 영화 내에서 모두 보여 주려 했던

욕심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데- 완급의 배치에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평범한 연출력의 감독이

었다면 관객들은 상영 중 몇차례나 영화가 끝난 줄 알고 일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입봉감독이라는데 이전에 단편영화계에서는 손꼽히는 인재였다고 한다. 단편영화 세계에는

무식쟁이라 프로필에 여러 개의 세계무대 시상작들이 있는데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시나리오

상으로 이완되나 작품 전체로 보면 그래서는 안 되는 부분들에 배우의 텐션 있는 연기나 (소리를 지

른다거나 눈을 부릅뜨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에서조차 자연스레 텐션을 일으키는 연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도저히 배우의 애드립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하정우는 한 인터뷰에서

워낙 디렉션이 완벽했기 때문에 단 한 장면도 애드립을 넣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적절한 음악을

사용함으로서 마지막까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연출이 워낙 눈에 띄는 장점이었을 뿐이지, 완급에 대해서는 실패를 언급했지만 신선한 코미디와

생생한 사실감, 균형잡힌 인물간 관계등을 보여준 시나리오도 수작급이었고 수년 내 손꼽히는 배우

로 등극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김윤석의 호연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영화의 90% 이상에 출연하

는데, 시나리오를 받아드는 순간 겁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아주

머니들은 지수원과 불륜이 났었던 웬 아침드라마를 꼽고 주위에서는 대부분 '타짜'의 아귀를 꼽지

만 나는 아직도 '범죄의 재구성'에서 천호진의 옆에 붙어 있던 진짜 직업이 형사같은 형사 역할과

'시실리'의 동네 아저씨를 잊지 못 한다.)


때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나이에 마침내 도달하게 된 것을 발견한 것은 과외의

소득. '연출력'에 대해 재미있게 비교해 볼 수 있는 두편의 영화를 본, 꽤나 보람찬 방학중 하루였

다. 열심히 일했을 여타의 스물여덟들에게는 따로이 사과를 전한다. 열심히들 살아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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