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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여행

애초에, 우발적인 여행이었다. 아침 열시라면 도무지 내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주의 중반부터 이번주의 끝까지 온통 휴가인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

이 있기에 아버지답지 않게 계획없이 떠나는 여행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차를 타고 가는 여

행이니 비몽사몽 열시모드로 움직였는데, 덕분에 가방에는 읽을 거리도 별로 없는 책 몇 권 뿐이었

고 휴대폰의 배터리는 출발할 때부터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춘천으로 가자고 했다. 여행이 강원도까지 이를 줄은 몰랐던 나는 게시판에 강릉이 보일

무렵부터 말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이왕에 온 거 동해를 보고 가자고 했다. 이상스레 우발적이

었던 아버지는 그 의견도 쾌히 들어주었다.


철이 든 이후로 자가용에 탄 채 강원도를 지나가기는 처음이었다. 버스와 자가용, 몇미터 되지 않을

그 높이의 차가 얼마나 다른 광경을 보여 주는지 나는 조금 놀랐다. 그런 때에는 한편으로 인천이라

는 척박한 토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아름답고도 아름다

운 곳에 살아, 다른 지역에 가도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 한 채 가슴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향수뿐이

라면 여행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아무튼 짧지 않은 시간을 달려 세식구는 동해안의 최북단 해수

욕장이라는 명파(明波) 해수욕장에 닿았다.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번쩍번쩍한 다리나, 드넓은 주차장에 드문드문 서있는 차량들이 아마도 요

근래에 처음 개장한 해수욕장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이틀을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 넓은

해수욕장에 열명 이상의 사람이 한 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몰라서 안 오는 것 같기도 하고,

38선 위쪽인 것을 감안해 보면 귀찮아서 안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호젓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우리는 애초 밤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기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더 머무르기로 했다.


그 준비를 위해 다시 인적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했다. 조그마한 도시의 이름은 고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닭을 튀겨왔고 어머니는 떡과 수영복을 사 왔다. 나는 뭐 읽을 거리가 없나 해서

근처의 편의점을 찾아 보았지만 베스트셀러중의 베스트셀러들만 있는 터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며 다시 차로 돌아왔다.


다시 명파해수욕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해가 산너머로 넘어간 뒤였다. 지리에서 배운대로 동해

는 해가 진 뒤에도 물이 그리 차지 않았지만 젖은 몸을 말릴 때가 걱정되어 들어가지는 못 하고 사온

음식들을 먹으며 바닷바람을 쐬었다. 하나둘씩 뜨는 별을 보다가 영 심심해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

는 길에, 나는 문득 유성을 보았다. 그날밤 하늘을 쳐다 본 것이 모두 합해 아마도 두어시간은 될텐

데, 그 시작을 유성으로 장식했으니 한편으로는 운이 좋고 한편으로는 불운했다. 즐거운 놀라움이기

는 했지만 도무지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소원을 빌기 위해 두번째 유성을 기다리다 결국 나는 가벼

운 감기에 걸렸다.


저녁무렵에 먹은 닭이 과했는지 밤중에 나는 배의 통증을 느꼈다. 화장실이 있기는 했는데, 음, 그걸

본 사람이 있을까, 아무튼 공사가 덜 된 듯한 거품이 변기 내에 온통 덕지덕지해설랑은, 주위의 사람

들에게 물어 본 결과 최신공법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나는 여행을 온 김에 조금 과감한

선택을 해 보기로 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초저녁부터 눈여겨 보았던 갈대밭이 있

었던 것이다.


일본의 하이쿠중에 달에게 엉덩이를 까 보인다, 라는 것이 있는데 정말로 그랬다. 날은 그믐이라 아

마도 아가씨 달이었을텐데 미안하게 되었다,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기분좋게 일을 봤다. 바람이 불고

있어 냄새도 나지 않았고 갈대가 울고 있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쾌변이었다.


걸어나오는 길에 그 시간에서야 도착해 갈대밭 옆에서 자면 풍미가 있다고 떠들며 텐트를 치고 있

는 한떼의 젊은이들을 보았다. 미안한 건 달뿐이 아니었군,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외며 나는 종종걸

음을 쳤다.


부모님은 라디오 국악채널을 틀어 놓고 잠을 청했지만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안에서

쪼그리고 자야 하는 것도 한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잘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열두

시부터 두시경까지 터덜터덜 걸어다니며 바람이 덜 부는 곳을 찾아 방수돗자리를 이불 삼아 돌돌

말고서는 이미 서너번씩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 했는데, 내 옆에 서 있던 차의 라디오에서는 서울

이 오늘 36.2도였다고 했다. 세상에, 난 지금 추워 죽겠는데.


다음날인 오늘 아침에는 황태해장국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낮에 약속이 있었던 나는 부모님이

바다에 들어간다, 샤워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설악산에 들른다 하는 통에 입이 대퉁 나와 있었다.

꼭 올라와야 만 한 일이었는데, 동네 친구들이랑 쭈쭈바 사 먹으러 가는 약속인 줄 아는 건지 아직

도 애기 취급 당하는 데에는 심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 보고 싶던 비선대를 눈 앞에 두고

서도 풍풍거리며 돌아서고 말았다.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튼 돌아오는 길

내내 비선대와 귀면계곡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년전에 그렇게 힘들게 갔던 곳을 차타고 편하게

갔는데도 안 보고 돌아오다니, 에이 제길. 에이 제길. 미안하다 설악. 서른 되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갈게. 미안.


결국 부모님의 욕심과 내 심통이 타협한 시간은 오후 세시쯤이었다. 익숙한 인천의 산들이 눈에 들어

오고 어머니가 차안의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끝이 났다. 일상에서 벗어나 있었음

에도 가장 격렬한 일상이었던 이틀이었다. 아무튼 여행을 이렇게 편하게 다녀오기도 쉽지 않은 일이

니 한동안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 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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