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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에이





후후...일기를 꽤 길게 쓰다 말고 지인이 msn으로 보내 준 동영상 보다가 컴퓨터가 다운되어 버렸다.

벌받았지 뭘.



호감이든, 그 반대의 것이든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속에 서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일정이 한

주를 주기로 돌고 있는 것 같다. 한시간 반동안 지하철을 타고 있는 동안에도 실감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인천터미널역에서 내려 고향의 향기를 후욱 들이마셨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푸우 내뱉는

순간에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다시 돌아보게 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번주에는 후회할 만한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긴 항상 그렇지만. 그러한 후회들은 한 편으로는 반성의 단초가 되고 한 편으로

는 아직도 할 일이 더 많은 생에의 애착을 불러 일으킨다. 어느 것이든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생각들

이라 역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십여분의 길을 나는 대단히 진지하게 걷는다. '진지하다'는 것은

실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 시간에 부여하는 무게이고, 실제 모습은 최대호 원맨쇼에 가깝다. 요새는

어쩐지 감정이 풍부해져서, 이번 주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며 아, 괜히 했다 싶었던 일이나

부끄러운 일들이 떠오르면 얼굴을 싸쥐고 탄식을 내뱉는가 하면 행복했던 기억이 부상할 때에는

눈이 찢어져라 웃으며 덜컥 멈춰 서 있기도 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평생의 봄들 중 가장 혹독했다고 생각하는 시간, 97년의 봄에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마음

에 있는 관계를 시도했는데 거절당한 유일한 이이기도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었던 것은 기억하

고 있지만, 아직도 살고 있는가, 어찌 그 후로 한 번을 못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 사람을 잘 모른다. 그저 학원수업에서 몇 번 본 기억이 다여서, 딱히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리 말이 많은 축이 아니었던 터라 목소리를 들을 기회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그렇게 길에서 다시 만나도 아는 척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얼굴을 보는데 절로 '어!'소리가 나왔다. 지금 앉아서 생각해 보면,

가벼운 일탈을 하고 싶었나 보다. 내 생활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 다시 만날 기약이 별로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일탈에의 욕구.

'아닌데.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뻔뻔하게 말 거는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레 말을 걸 수 있게 되는 그, '분위기'. 나 혼자의 '기분'이 아니라 '분위기'

였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 '어!'소리

에 돌아본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모르는 만큼보다 훨씬 더 나를 모르는 주제에 살풋 웃었단

말이다.



같은 동네에 사니까 근처의 적당한 놀이터에 앉아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짧다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 사람과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보다 길었으며, 당연히 나는 내가 지금까지 그 사람에 대해 알

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두어번만 더 밀었더라면 넘어갔을 거라는

고백도. 우후후. 그럼 그렇지. 역시 최대호. 어흥.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6년전의 이야기라지만, 내가 이성을 보는 눈은 그 때에서 조금도 달라

지지 않았다.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의 입에서 그 때 두어번만 더 밀었더라면 넘어가

려고 했는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재미있기만 했다. 추억이 비참한 쪽에서 아름다운 쪽

으로 넘어간 나이스한 순간이다, 라는 생각 정도 외에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과거의 사람

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구나, 라고 느꼈다. 앞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나와 함께 2003년

을 살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고운 사람과의 만남에서 먼저 일어나자고 말한 쪽

은 나였고, 전화번호를 청해 받아간 것은 그 사람이었다.



격렬했던 한주의 끝무렵에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달라 붙었다. 천천히 돌아보기도 할 겸,

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는 오랜만에 러브레터 OST를 들으며 산책을 할 생각이다. 가끔은 재미있었던

순간보다 이 산책길에서의 회상이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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