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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어머님




아침 여덟시에야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고 있거든요. 인천에는 주말마다 과외를

하러 내려 오는데 이번에는 충전기를 그만 깜빡했어요. 배터리가 다 되어 전화기가 절로 꺼져 버려

아무도 저한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나봐요.


미랑이 아시죠? 인주도 아시고요. 민석이와 함께 다 사랑하는 승학초등학교 2기들이잖아요. 인주가

어젯밤부터 연락을 돌렸다고 하더라고요. 미안하기도 하고 얼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황황

히 집으로 왔어요. 부평역 근처의 친척형네서 잤거든요.


오랜만에 꺼내들은 정장이예요. 이런 일이 있을 때에만 입게 되는 것 같아 조금 꺼리게도 되는 옷

인데, 어머님, 그거 아세요? 오륙년전에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부터 입게 되었던 바로 그 옷인데,

되지도 않게 어른 흉내 내는 것처럼 몸에만 걸치고 있던 친구들이 이제는 그 안에 딱 들어가고

거기에 어울리는 뒷모습까지 가져 간다는 거. 헤헤. 저희도 이제 스물셋이거든요. 제 친구들과

저는 스물셋 치고는 검은 정장을 약간 더 입은 편이긴 하지만요.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요새 감정이 조금 과잉상태라서. 그런데 민석이가 약간만 물기

가 있는 눈으로 어깨 쭉 피고 나오니까, 감히 울 수가 없더라고요. 민석이도 많이 컸어요.


어머님 앞에 향을 피우고, 아직도 많이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민석이한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적으나마 제 이름 석자 적은 봉투에 몇 푼 넣어서 민석이 따로 줬지요. 제대로 안

냈다고 화내지는 마세요. 여기저기 상 다니면서 보니까 상주들은 그래도 주머니에 돈 좀 있어야 잡일

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만 조용히 다스릴 수 있는 것 같길래 한 거거든요.


미랑이랑, 지연이랑, 민석이랑 넷이 앉아 이야기를 했어요. 그 장례식장, 저도 조부상을 거기서

치뤘거든요. 그래서 택시에서 내려 찾아 들어가는 길에 그맘때쯤의 일을 회상하기도 했는데...

여하튼 저때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었거든요. 득시글 득시글. 그런데 오늘은 어머님 혼자만 계시

더라고요.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비가 내리고 3월 중순인데도 나무엔 잎 하나 없는.



어머님.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가시는 때에 이승에 비가 오면 가시는 길에는 햇빛이

화창하게 난대요. 그러니 어머님 가시는 길에는 햇빛과 초록잎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런 생각이 나

민석이한테도 잠깐 얘기해 봤는데 위로가 되었을까나 모르겠어요.




슬픈 길을 같이 돌아올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예요. 성지에서 지연이랑 헤어지고

민석이와 어머님이 예전에 살던 곳을 문득 돌아다 보았는데, 갑자기 어릴 때 민석이 생일잔치가 생각

났어요. 어머님이 피자를 만들어 주셨고, 그게 어찌나 가게 피자보다 맛이 있던지, 게다가 민석이

는 그 맛난 양념들을 밥반찬으로도 싸서 가지고 왔었죠. 열세살 때니까, 야, 그게 벌써 십년이 꽉차게

지난 일이네요. 그런데, 그 맛이 문득 혀끝에 생각나, 가시는 길 바쁘시겠지만 외람되게도 어머님이

잠시나마 절 떠올려 주신 건 아닌가 하고 혼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생각을 했더랬지요.


어머님. 전 어머님 앞에 다녀와서 잠시 잠을 자고 이제 과외하러 가요. 아이가 잘 못 알아 들어서

활기차게 설명해야 하거든요. 칭찬해 가면서. 내일부터는 대학교에서 새로 받은 후배들과 또 즐겁게

살아야 하고요. 상을 많이 겪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피가 섞인 혈족의 상은 아직 안 겪은 탓인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몸에 배 있는 터라, 돌아오는 길에 구두에 묻은 빗물처럼 집 현관문

앞에서 어머님 생각을 툭툭 털고, 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게요. 어머님도, 가시는 발걸음에 돌부리

하나 채이지 마시고 편안히 소풍가듯 가세요. 저도, 민석이도 이렇게 열심히 열심히 살다가 따라

갈게요.


감히 송문도 뭣도 안 되고, 그저 가시는 길에 심심하시지 않게 파적하시라고 적어 봤어요.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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