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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인생은 아름답다.

1.
나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다.


2.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장기라 생각하고 십분 활용해 온 특성이었다. 나는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기

위해 집중하는 데에 강하다. 떄로 이것이 허영이나 권력욕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지금의

내가 서 있는 기반들 중 긍정적인 면의 대부분은 그 성질에 기인한 바 크다.


3.
아메리칸 뷰티는 묘한 영화였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내 눈을 잡아 이끄는 것은 오로지 가슴

뿐이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만한 스토리가 없는 듯 했고, 기껏해야 잘 안 팔릴 수필 한 권같은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말 솔직히 고백하자면 포스터만 보

고 뭔가 제대로 불끈시켜줄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영화표를 사 들게 된 것이었다.


4.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나의 단기목표는 이목의 집중, 웃음의

유발 등이었던 탓에 나는 남보다 안주는 적게 먹고, 술은 배로 들이켜야 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단기목표는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와도 옆으로 앉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애썼고, 덕분에 의자의 맨 끝에 걸쳐져 있

던 엉덩이와 부자연스레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어깨는 약속이 끝나고 일어서는 순간에 항상 내 허리

를 괴롭혔다.


5.
아메리칸 뷰티를 다시 보게 된 건 이십대 초반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약속이 잡히지 않음에 초조

해 하다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비디오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전화가 오면 나갈 태세였기

때문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볼 영화가 필요했다. 막상 나가려는 순간에 조금만 더 보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은 비디오는 모두 빼고, 남은 것들을 뒤적뒤적거리다가 가슴이나 다시 볼까 하

는 생각에 꺼내 들은 것이 아메리칸 뷰티였다.


6.
전화는 특히나 나를 땀나게 하는 물건이었다. 같이 앉아 있으면 어떤 다른 말을 할까 고민하는 도

중에 표정이나 손짓등으로 간극을 메울 수 있지만 전화는 오로지 목소리만이 존재한다. 나는 통화중

의 침묵을 언젠가부터 나의 무능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언제나 화제가 필요했고,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한겨울에라도, 십분 이상 통화를 하게 되는 날이면 나는

옷을 흠뻑 적시고는 했다.


7.
뻔한 결말이잖아, 하고 예상하셨겠지만 그 주말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이년여가 지난 지금에 와 생각

해 보면, 그 약속이 누구와 어디에서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던 때의 나의 기분-그 때

주위에서 나던 향-입고 있던 옷까지, 나는 그 모든 상황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조금은 부끄럽게 기억

하고 있는 것인데, 나는 약간 울었던 것 같다. 음, 조금 더 부끄러워지자면, '약간' 보다는 약간 더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8.
어제는 정말로 즐거운 날이었다. 인생의 커다란 즐거운 날들을 돌이켜 보면, 의외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놀랄 때가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즐거워도 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인가를 다시 물어봐야 할 정도로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부평역에서 갑작스레 쏟아져 옷을 모두 적신

비도 나를 불행하게 하지는 못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냐고. 글쎄, 말했지 않은가. 커다란 즐거

움은 막상 떠올리려면 떠올려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하나, 마음을 울린 것이 있다면, 나는 스물넷에

이르러 드디어 사람의 옆에 진심으로 앉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9.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나는 일찍 자고 싶지 않았다.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오락도 해 보고 하다가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언가 마침표를 찍을 만한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하고는 아메리칸 뷰티를 틀게

된 것이다.



0.
시간은 지나가고 나는 변했다. 이 영화 중 오로지 단 하나의 미덕인 줄 알았던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

에는 어쩐지 빈틈이 보였고, 아네트 베닝의 캐릭터에게는 조금 더 짜증을 내게 되었으며, 내 배때기

에 기름이 낀 만큼 소녀들의 가슴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나는 중간중간 몇번이나 마을쪽으로

다가가던 롱 테이크 신이 버냄의 죽음 뒤 마을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의 마지막 대

사에, 예전보다 조금 더 울고 있었다. 그런 기분이다. 나는 인생의 한 단면을 엿보았다. 버냄이 입속

에서 장미꽃잎을 꺼낼 때처럼 조심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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