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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심야영화를 보다.






과외하는 아이가 중간고사 기간이라 하여 금요일 수업을 미루었다. 덕분에 금요일의 열시까지 언젠

가 연출이 되면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연기지도법을 실행해 보고, 연습이 끝난 뒤에는

사내녀석들과 (흑흑) 정동스타식스로 심야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 세편을 연속해서 보는데도 만원밖에 안 하는 데에는 정말 깜짝 놀랬다. 자리도 꽤 편안한 편이

어서 두번째 영화부터는 세자리를 차고 앉아 한 자리에는 짐을 놓고 두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양말까

지 벗고 영화를 보았다. 2관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적당한 크기로 안온한 느낌을 주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지만 에어콘을 틀어 주지 않아 무척 더웠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한편만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 영화를 보니까 신발을 벗는 것은 예사고 바지를 걷거나 러닝셔츠만 입고 있기도

했다. 다음에 또 보러 갈 때에는 반팔티셔츠와 반바지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찬히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그 느낌이 좋았다. 다음번에는 혼자서

찾아와 즐겨 봐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중얼거렸다.


첫 영화는 화제의 그 작품, '살인의 추억'이었다. 감독의 전작 '플란더스의 개'로 최소인원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던 기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감독에 대한 기대보다 배우와 시나리오에 대한 기대를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가진 채 영화를 보았다. 감독이 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연세대학교

사회학과라고 한다.) 조금 더 정이 가지만 그것과 연출력에 대한 기대는 별개니까.

<씨네 21> 400호의 인터뷰에서도 봉준호 감독이 말하지만, 송강호라는 배우는 이제 정말이지

'괴물'이 된 것 같다. 배우로서 확연한 아우라를 가진 탓에 근작들에서는 쟁쟁한 감독들과 함께 작업

하면서도 누가누가 이기나 연출력과 연기력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던 것에 비해, '살인의 추억'

의 송강호는 하나의 거대한 배경(背景)같았다. 영화 한 편 전체를 통해 누구 하나 모자라는 연기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한 호연들도 몇 장면 보이고 있지만 그 모든 장면 뒤에 (화면에 출연하지 않는 순

간까지도) 박두만이 있었다. 마치 안개나 구름처럼, 감독의 연출노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라는 캐릭터를 훌륭히 구축해 내는. 아아, 괴물이다, 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뇌까렸다.


백인이 연기하면 백개의 연기가 나온다. 이것은 처음 연기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하고 나

도 그렇게 하려 하는 하나의 연기관이다. 당연하다. 백인이 있으면 백개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연기는 인생에서 나온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을 해 봐야 내 목에서 니콜 키드먼과 같은 목소리

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정우성에 맞춘 카메라 높이로 날 찍으면 '비트'

가 안 나온다. 화면에 배우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연기는 배우가 하는 것이다. 설경구는 <씨네 21>

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살인의 추억'에도 송강호의 일상이 있어요. 아주 적나라하게 있지.'라는

말을 했다. 말버릇이나 손버릇등은 그 배우가 그 역을 연기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

므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연기는 배우가 그 안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받아 하는 것이다, 라

고 해야 할 것이다. 배우 최민식은 이를 가리켜 '배우는 무당이다'라고 했다. 아아, 송강호이기 때문

에 저런 개그가, 저런 연기가 나오는 거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박두만임 또한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송강호는 괴물무당이다.


장면간의 유기관계에 있어서 연출의 저력도 '살인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빠뜨릴 수 없다. 다만 이것

은 그날 느꼈을 뿐 이전에 공부를 하거나 글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던 탓에 다음으로 미룬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통해 보았던 얼굴들을 영화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도 반가운 경험이었다. 극단

파크의 연극 '개그맨과 수상'을 보고 재엽이형의 친구라며 같이 맥주를 마셨던 진호형의 이름을

캐스팅 리스트에서 보고는 잠이 확 달아났다. 어이, 부러워라.


이십분의 쉬는 시간 뒤 '엑스맨 2'를 관람했는데, 1편보다 확실히 이야기의 폭은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창 졸립던 차에 액션 신이 그다지 많지 않아 닥터 진이 자신을 희생하는 장엄한 장면

은 눈이 뻘겋게 빛나는 마지막 순간밖에 보지 못 했다. 새로 나온 캐릭터인 '데스 스트라이크'의

가슴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던 것과 아무리 봐도 깡통대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매그니토의 철모자

가 기억에 남는다. 휴 잭맨의 감탄 나오는 팔뚝이야 1편부터 워낙에 감동적이어서 달리 할 말이

없고, 개인적으로 배우가 교체되기를 가장 바랬던 로그는 더욱 요상하게 생긴 채로 다시 등장했다.

이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도무지 양키센스는 이해할 수가 없단 말씀이야.

'차별'과 '차이'의 차이를 뮤턴트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좋지만, 액션영화답지 않게 액션이

많지 않아 벌로 자세한 평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과외가 두개나 있어서 집에 가 봐야겠다는 한 후배는 다섯시에 맞게 된 두번째 쉬는 시간에 나가고,

나는 잠에서 깨기 위해 두어번이나 찬물로 세수를 하며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세번째 영화는 김민종

김정은 주연의 '나비'. 포스터 세트를 만드는 데에만 천만원을 썼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허허허.

인정. 근래 1년 내 최악의 영화다. 주제에 화면은 얼마나 뽀대나게 써 줬는지 정말이지 개발의 편자

라는 말은 '나비'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돈 남으면 '질투는 나의 힘' 한번

더 보기 운동같은데에나 대 주지. 김민종이야 버림받기를 자처하는 배우라지만 그 좋은 배우진들을

가져다가 겨우 고렇게 써 먹다니. 엄청 신선한 횟감 가져다가 회덮밥해 먹는 것을 보듯이 못내

안타까웠다. 어이구, 생각도 하기 싫어. 도대체 올해가 몇년인 줄 아는 거야?


전체로는, 하룻밤 내에 할 수 있는 것 치고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신촌 살면서도 택시로 삼천원 나오

는 거리에 있는데서 그렇게 좋은 행사가 있는데 삼학년이 되도록 매일밤 신촌에서 굴러다니고, 거기

가 온통 세상 전부인 줄 알고... 반성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여하튼, '살인의 추억'. 올해의 지금까지 감히 상대평가로 매기기조차 미안한 제 1의 영화로 삼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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