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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시간을 달리는 소녀





지난 생일에, 도환 형으로부터 생일선물로 nds를 받았다. 사실 산지 며칠 되지도 않은 형으로부터

형은 플레이스테이션도 있고 엑박360도 있고 psp도 있으니 이 거지에게 적선 좀 하라고 강탈해 온

뒤 돌려주지 않은 것이 반년째의 일이다. 형은 (아마도 더러워서) 새 것을 사고 내가 쓰던 것을 선물

삼아 주었다. 생애에 받은 선물 중 액수상으로는 가장 비싼 것이었고 무척이나 좋아하는 물건이었

지만 아무래도 가지고 있던 것을 선물로 받자니 뛸듯이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왕에 내 것이 된 참이라 이것저것 그 용도를 면밀히 살펴 보다가 동영상 재생이 된다는 것

을 발견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주위 nds 유저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나와 기계와의 인연은 항상

이렇다. 덕분에 심슨가족과 프리즌 브레이크, 히어로즈등의 시리즈물까지 마음껏 섭렵하는 요즘인데.


그 와중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접하게 됐다. 형의 과도한 애니메이션 집착에 시달려, 나는 정작

본 작품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애니메이션이라면 손사래부터 치고 보는 터라 일단 받아만 놓았던

것인데, (그렇다. 현재까지 nds에서 동영상을 재생해 줄 수 있는 매체는 전부 불법이다. 딱히 공공연

하게 쓸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프리즌 브레이크가 주는 과도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다 못

해 하루쯤은 아무 생각 안 하며 쳐다볼 수 있는 영상물이 필요하던 차에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좋은 만화였다. 장르를 만화로 설정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색감도 우수해, 작은

화면으로 보고 있는데도 몸이 편안하게 나른해졌다. 스토리야 뭐, 몇십년째 영화로 드라마로 계속

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그 때마다 큰 호응을 받고 있다니 내가 말할 수 있는 주제가 못 되는 것이고.


과학적 상상이 결합된 이미지나 구김살없고 씩씩한 캐릭터들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다른 것이었다. 결국 비밀이 밝혀진 뒤 치아키는 미래로 돌아가게 되는데, 미래

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에 마코토는 단 한번의 고민도 없어 '달려갈게!'라고 소리친다.


타임리프라는 미래의 기술을 더 이상 쓸 수 없으니,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시간을 '달린다'는 것은

이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혹여 달릴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달리는 것보다 시간이 더 빨리 내 주

위를 지나가 버린다면 그것은 달리는 게 아닌 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사실도, 자신의 입으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될 순간들이 무수히 올 것이라는 사실도 아직 이 아이의 머리속에는

없다.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빨리 달려가면 사랑하는 사람을 빨리 만날 수 있다'뿐이겠지만, 그 기

저에는 달리고 달려도 내 앞에 시간은 영원무궁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 거대한 착각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사랑스러웠다. 여전히 그 착각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를 것

이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지쳐 잊어 버린 사람한테는 소용 없는 일이겠지만, 고작 몇년 전에야 깨닫고

여전히 마음쓰며 살아가는 늦깎이 청년한테는 가슴시린 한마디였다. 달려갈게.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전에도 이 만화는 영상화일로서 이미 많이 돌았다고 하는데, 그 때의 제

목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시간을 건너온 소녀'의 두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설정

이나 내용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면 '건너온' 쪽이 더 적실하겠지만, 원작자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를 생각해 보면 '달리는'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을 달려버릴 정도로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청춘이든. 사랑

이든.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광채로 빛나는, 어떤 것이 있었

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제는 달릴 수 없거나 달리지 않는 친구들에게. 라고. 들은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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