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3

소품 [첫키스]

#scene 42.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비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어쩐지 애상감을 전달하

고 있으나 보는 사람의 심상을 온통 그것으로 채울만큼 숨막힐 정도는 아니다.


남 : (문득 담배를 피워물고) ...정말이지 기억할 만한 첫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야. 그

      렇게 생각하지 않아? 더군다나 첫키스가 첫사랑과의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응? 나?  아, 이거 미안한데. 어쩐지 내 얘기는 아닌 것처럼 말해 버렸는걸. 하지만 그건 내 얘

      기였어. 아하하. 미안.

      아니, 뭐 별로 특별한 장소는 아니었어. 그런건 80년대 유머에나 있는 얘기인 줄 알았지만,

      어이, 생각해 보라구.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사람이니 야심한 시각에 술집은 둘째치고 어디 갈만

      한 오붓한 데도 없었다구. 그래도 남들 눈은 있으니까 으슥한 곳이 좋고. 80년대나 그 뒤나, 놀이

      터만한 곳이 없는 거야. 놀이터에 형광등 켜 놓는 거 봤어? 좀 비싼 동네 놀이터에는 숨을 데도

      많다고.   ...어라, 웃잖아?  공감하는 모양이군 그래. 80년대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라니까.

  
      그네 없는 놀이터는 없잖아. 아니, 그렇지만 사실 무슨 흑심을 품고 그네를 태운 건 아냐. 그저 태

      워 주고 싶었던 것 뿐이지.

      처음에는 뒤에서 밀어 주다가 그 짧은 순간에도 얼굴이 보고 싶어서,  아.   미안미안. 그렇지만

      어릴 때 얘기잖아. 넘어가 달라구. 첫사랑이었다니까.

      그래서 앞쪽으로 돌아가 오는 그네를 덜컥 멈추었다가 휘익 밀곤 하는 것을 몇 번 했는데 번뜩

      생각이 나더라고.

    
      '관성'이라는 것이 말이지.

    
      그래 한 번 세게 휘익 밀고 손은 적당히 앞쪽에 그넷줄이 걸리게 벌려 놓은 채 가만히 기다렸지.

    
      별이, 반짝반짝했달까. 으하.  

      그 뒤로 몇 번이나 다른 입술이 왔다 갔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향기, 여름밤의 시원

      한 바람, 잠시 눈을 떴을 때에 얼굴 뒤쪽으로 보이던 달과 별. 그건 못 잊지. 안 잊기도 하고.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난 첫키스를 '당한' 거라고. 꼼짝도 안 했으니까 말야. 흐흥.


      음? 재미없어? 그렇지만 그건 한 청년이 그 인생에서 살아있어 감사하다고 느낀 단 세번중에 한

      번이었는데.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라고 절로 생각하다니, 대단하지 않아?

      뭐, 어차피 남의 얘긴 재미없기 마련이지. 어쨌든, 그게 내 첫키스 이야기. 그걸로 끝.


      몇살이었냐고? 글쎄,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이미지만으로 추론되는 첫키스 나이보다는 훨씬 뒤

      라는 것정도만 말해두지.

'일기장 > 20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 장난감.  (0) 2003.01.12
내 생각대로 인생이 가고 있다.  (0) 2003.01.11
ģ??  (1) 2003.01.09
귀걸이  (1) 2003.01.09
어제의 사진입니다.  (4) 200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