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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상주유람기





저녁 여섯시 근처에 출발한 여행이었다. 기차여행은 모르겠지만, 버스여행이라면 역시 저녁부터 시

작하여 별이 총총 빛을 발할 무렵 추위를 느끼며 버스에서 하차하는 그 시간대가 가장 좋다. 주위의

풍광을 즐기기에도 그 이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어

디까지나 주관적인 여행이므로 상관없다.



어쩐지 요즘은 달이 낮게 뜬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어릴 적 읽었던 '혼자 뜨는 달'이라는 성인소설

을 연상해 내었다. '...현주는 가쁜 숨을 내쉬며 이불을 꼭 잡아 쥐었다...'등의 별거아닌 표현에 씩씩

콧숨을 내뿜으며 흥분하던 기억이 나 피식 웃다가 요즘도 흥분하면 그다지 꼴이 다르지 않은 것에 생

각이 미쳐 웃음을 그쳤다.



외국에 나가 본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차창 밖 풍광은 대개 비슷하다. 나즈막한 능선의 연속과 그

아래로 주욱 이어진 밭들, 혹은 아파트밭들. 어느 쪽이건 그다지 신선한 장면은 되지 못 한다.

그나마 강원도로 가는 길은 대관령커브부터 해서 볼 만한 것들이 주욱주욱 늘어서 있지만, 경북은

이미 여러 차례 가 보아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책에 몰두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근래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 다시읽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주인공

들 중 에르큘 포와로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토미와 터펜스의 모험이야기였다. 포와로의 이

야기가 정중동이라면, 토미와 터펜스의 이야기는 동중정이다. 여하튼 유쾌한 커플이다.



예상대로, 상주에 내려섰을 때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는 밤이었다. 다만 (이번 여행 전까지도 제천

이 경북인 줄 알고 있었던 탓에) 어릴 적 보았던 제천의 별천지 하늘에 비할 것도 없거니와, 인천의

하늘과 비교해 봐도 그닥 다를 것이 없는 하늘에 약간 실망을 하였다. 뭐랄까, 별밝기가 조금 다른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보았을 때에는 충북쪽이 오히려 더 별이 밝았다.)



어쩐지 배가 고파 작은 분식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인천사람이라는 말에 꾸역꾸역

먹고 하나를 더 사 먹었다. 그러나 공짜로 줬어도 하나 더 먹으라고 했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

애향심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한참 두개째를 다 먹어가고 있는데 선배가 왔다. 전혀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긴 변하는 얼굴

형도 아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맥주집을 찾아 통일연세를 외쳐가며(실은 나만...) 호기롭게 맥주

를 마셨다. 안주인 칠면조 훈제 비스무리한 것은 꽤 맛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먹으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래는 선배의 집에서 잘 생각으로 간 것이었으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다는 말에 동네여관을

찾게 되었다. 머물게 된 곳의 이름은 브니엘장. 이 이름도 낯이 선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 앞에 있는

여관이름을 보고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장'.  왜 여관 좀 모인 곳이면 '동양장'이나

'황금장'은 꼭 있는 것일까. 이건 예외가 없을 정도다. (실화를 배경으로 썼던 최대호 본격 음란소설

'주안 동정남'의 실제배경도 황금장이다.)



여관은 평범했다. 대충 옷을 벗고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하나 꺼내 마신 뒤 이것저것 뒤져보던 나는

이내 심심해져서 프론트 근처에서 대충 괜찮은 제목들의 음란비디오들을 들고 왔다. 그리고 십분동

안 낑낑대다가 결국 비디오와 TV를 연결하는 케이블이 아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곳저곳

을 둘러보는데 신기한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여관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전화기에 버튼이

달려있어야 할 부분에 평평한 스티커들이 주루룩 줄을 맞추어 붙여져 있고 그 스티커들을 누르면

거기에 써진 가게들로 연결이 되는 장치였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들 때문에 신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상백'다방인지, '삼백'다방인지, 여하튼 선전문구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상주 최고의 미인이 즉석배달'

...오호...상주최고의 미인이라...

그래서 그 뒤로 어찌 됐는지는 쓰지 않겠다.



두시간여가 지나고 다시 한 번 비디오를 손보려 했던 나는 아예 포기를 해 버리고 여관에서 틀어주는

성인전용채널을 보기로 했다. 다행히 리모콘이 있어서 불을 끄고 난장판이 된 침대에 기어들어가

TV를 틀었다.



내용은 평범했다. 파우스트를 따라 베낀 것으로, 한 남자가 악마와(악마의 이름은 메피스토 페니스)

계약을 맺고 투명인간이 된다. 그 뒤론 뻔하게 여탕도 가고 탈의실도 가고 하다가 갑자기 본격멜로

로 탈바꿈하여 사랑하는 여자를 덮치려는 남자를 막아내고, 여자를 구하는 댓가로 결국 악마에게 영

혼을 팔고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판에 여자가 진실한 사랑으로 그를 구해내고, 메피스토 페니스는

진실한 사랑에 감동을 받고는 한명은 꼭 데려가야 하는 규칙때문에 강간하려 했던 그 놈을 붙잡고선

사라진다. '...그 사랑을 잊지 말게...'라는 마지막 한 마디도 잊지 않는다. 남겨진 그들은 방금 전까

지 악마를 눈앞에 두고 생명이 오고 간 것은 몽땅 까먹고 삼초정도 눈길을 주고 받다가 이내 부둥켜

안고 가쁜 교성을 내뱉는다.  세상에.



그 뻔한 스토리, 그리고 여배우들의 빈약한 연기력과 사이즈에 질려 버린 나는 어떤 다큐멘터리 채널

에서 해 주는 '노무현, 단일후보까지의 길고 긴 노정'이라는 세달전쯤의 프로그램을 보다가 혼곤히

잠이 들었다.



다음날인 오늘 아침, 나는 여관아주머니와 쇼부를 봐서 '후레쉬맨' 10편을 공짜로 얻었다. 그게 왜

거기 섞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옛날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비디오를 가방에 집어 넣고 양말을 신으려다가 혹여나 무슨 일이 또 있을

지 몰라 새 양말은 집어 넣고 신었던 양말을 다시 신으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신었던 양말을 다시 신을 때에도, 발이 바뀌어 신으면 어쩐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고 한다.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신었

던 모양을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물론 한 발에서는 악취가 나고 한 발에서는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좀 더 간편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런데 만약, 사람에게 발이 세개가 있었다면 어땠

을까?  어이, 거기, '그렇지만 난 발이 세개인데요'라고 손드는 청춘남학생. 난 생물학적인 진짜

발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여하튼 이런 생각을 하며 방을 나서 선배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온 나는 그곳의 따뜻함에 매료되어

어디에 갈 생각도 하지 못 하고 계속 올리고 있듯이, 사진들로 장난질을 하며 귀향시간이 다 되도

록 놀고 있었다. 아, 중간에 개그콘서트 재방송도 봤다. 우비삼형제의 그 왼쪽여자가 미치도록 귀여

워서 다시 보는데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돌아오는 버스길은 거의 대부분 무료하다. 더이상 읽을 책도 없거니와 길도 아는 길인 탓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갈 때에 그다지 주의를 하지 않은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괜찮은 풍경들을 많이 보았다.

산. 산을 보았다. 먹처럼 어두운 산을 보았다. 짐승처럼 숨을 쉬는 듯한. 동물이라고 표현하면 부족하

다.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짐승같은 산.



멀리서 보는 고향 홈타운은 정말이지 멋져준다. 괜찮은 곳에 살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정겨움과

버무려져 화악 올라오는 느낌.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오는 피곤한 몸에도 나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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