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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산정호수 마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났다. 정말이지 재수할 때에 익혀 놓은 '일어나야 할 시간에 마인드컨트롤해 놓고

딱 맞추어 일어나기'는 평생에 유용한 어빌리티가 되었다. 전날 조금 늦게 잔 탓에 걱정이 되었는데.



새벽의 용산역 직통 열차는(오늘자 조선일보에서는 '직통'이 아니라 '급행'이 맞는 말이라고 누군가

투고를 했지만) 한산했다. 그래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나마 눈이 즐겁기도 하였다.

과외하는 아이의 집에서 빌려온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다 읽고 약간 눈물이 난 채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노량진이었다. 한떼의 젊은이들이 우루루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훗, 열심

히 하라고 재수생들. 난 벗어났지롱.



전화가 전혀 안 들리는데도 운좋게 청량리 역에서 여행을 같이 가기로 한 형과 대뜸 만날 수 있었다.

다만 목적했던 삼척이나 어젯밤 갑자기 알아 보았던 태백, 그리고 오늘 아침에 찍어 보았던 증산역

은 몽땅 매진...그래서 알아 본 결과 경춘선과 태백선 몽땅 매진...  관광대국 한국 만세. 으흑.



일찍 일어나 피곤한 몸을 질질 끌어가며 63빌딩에 갈 것이냐 교보문고에 갈 것이냐등의 한심한 논의

를 나누다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청량리 역 앞에서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정처없이 가보자!

하고 마음을 먹었으나 정작 온 버스는 131번. 주요 경유지는 신촌...



될대로 되라지, 청송대 가서 사진이나 찍든지하고 타 버린 버스. 그러나 버스는 마치 운명과도 같이

중소도시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허름한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우리를 떨구고 말았으니...



역시나 거기서도 아무데나 찍어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운천'!  도시 자체로 특징을

갖는 곳은 아니나 '산정호수'로 가는 경유지라는 형의 말에 홀딱 반해 또다시 정처없는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강북에서 오래 걸렸지 서울을 벗어난 뒤 도착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다방이 곳곳에 보이는 허름한

터미널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산정호수. 그곳은, 그야말로 호수. 그 이상도 그 이하

도 아니었다.



분위기를 내고자 막걸리를 마셔 보았으나 근래 건전생활지향성을 띄기 시작한 육체가 받지 않아 딱

두잔만. 그리고 호수를 한바퀴 비잉 도니 처음에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었다. 문득 보인 온천간판,

노천이라면 피곤한 몸을 잠시 담구었다 출발하려 했건만 시설도 가격도 동네 목욕탕이라 다시 훌쩍

떠났다. 그리하여 동서울 터미널에 닿은 것이 저녁 여섯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려 떠났던 하루이건만 그저 서울 근교로 마실을 다

녀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뭐랄까, 누군가

'대호씨, 산정호수 어때요?'

라고 물어오면 잠시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려 보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좋아요. 한 번 가 볼만 하지요.'



좋아요. 가보세요.



마실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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