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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바다




꿈에 바다를 보았다.


나는 어두운 방안에 있었고, 내 앞에는 문이 있었다. 방은 마치 감옥과도 같아, 사방이 벽돌로

채워져 있었고 방안에는 아무런 사물도 없는 가운데 나와 적막만이 있었다. 나에게는 오로지 그

문이라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머물러 있는 것은 '가능'한 일일지는 몰라도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끌리듯이 문 밖으로 나섰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황무지, 황무지, 광활한 황무지뿐이었다.


나는 깊이 좌절했다. 뒤에는 엄청나게 좁은 가능성의 공간, 앞으로는 지나치게 넓고 많은, 그래서 사

실은 엄청나게 좁은 것과 다름이 없는 가능성의 공간.


문득. 문득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문열어 득칠아의 줄임말이 아니다. 아무런 의도없이 스윽.

옆을 보았다.


-지구는 둥글다고 했다. 그래서 멀어지는 배를 보면 배의 아랫부분부터 차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

다고.-



바다가 있었다. 꿈속의 바다는 마치 새의 날개와도 같았다. 새가 한껏 힘을 주어 날개를 윗쪽으로

휘어 놓은 것처럼. 혹은 둥근 지구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대지의 수평선, 그 연장선에서 바다는 완만하고 거대한, 거어대한 곡선을 그리며 위로 치솟고 있었다.


걸리버 여행기가 맞는지 모르겠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아 당장 탈수로 목숨을 잃어도 좋다고 바

닷물을 듬뿍 마셨는데 그것이 포도주였다는 이야기. 허풍선이 남작이었던가. 여하튼.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날 정도로 바다는 검푸른색이었고 마치 수십개의 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검푸른 수십개의 혀. 단순히 문자만으로는 징그럽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르지만, 내가 꿈 속에 본

바다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돈 주고 바닷가에 안 가도 되게 생겼다.


Beyond the blue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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