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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민간인 최대호입니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도용하게 되는 Back to the real life. 식상해서 차마 제목에는 쓰지 못 하였다.


아하하. 드디어 연극이 끝났다. 어딘가 후련하지만...그래도 연극 끝난 거에 비하면 하고 있으면서

힘들 때는 행복했었어.(tribute to 세르게이 본 미글라소프.)




5회에는 이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왔다. 그 사람은 나보다도 먼저 연극부에 있었던 사람이니, 선배

되는 입장에서 연극을 보러 오는 것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일이다. 연기하면서야 누가누가

왔나 일일이 신경쓸 정도로 여유가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연극이 끝난 후에는 문득 대하기가 꺼려져

화장실에 숨어 애꿎은 담배만 태우다 왔다. 평소에는 피우지도 않는 것을. 덕분에 어제부터 계속 가래

침을 뱉고 있다. 삼십분여의 다음 공연까지의 텀중 십오분을 그렇게 보내고 무대로 돌아왔는데 여

전히 그곳에 있어 황황히 도망쳤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돌아와 보니 없어 약간 복잡한

기분으로 분장실로 향했다. 이전 사람과도, 나와도 친하고 둘간의 이야기나 지금의 어색한 관계도

잘 알고 있는 한 동기가 못난 놈아, 라며 머리를 때렸다. 웃을 뿐이었다. (사실 그 동기가 머리를 때리

는 일에 익숙해 있기도 했다. 손은 자그마해서는 원, 체중을 실어서 때리는 데는 당할 장사 없다.

나연씨. 미안.)




어제는 정말이지 쟁쟁한 팀들이 왔다. 공대극회도 한 차례 왔다 갔긴 했지만, 어제는 학교에서 제일

큰 연극동아리인 극예술연구회와, 빵빵한 세트와 스폰서로 우리를 압도했던 치대극회, 그리고 우리

연극과 인생의 필생의 숙적(히히) 날개가 와 준 것이다. 하나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세개의 극회라니.

그것도 다들 정평이 나 있는 극회들이라, 우리 애들 쫄아 있는 것이 안스러울 정도로 생생히

느껴졌다.




드디어 마지막 6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제 차례를 마친 연기자들은 하나둘씩 허탈감과 아릿함을 맛

보며 내 마지막 연기를 숨어 지켜보고 있었고, 나 또한 조금만 있으면 엄습할 똑같은 기분을 예상하

면서도 하나의 실수라도 보이지 않기 위해 식은땀을 흘려가며 긴장하고 있었다. 실수를 하고 나서


'저기요, 제가 지금 마지막회라는 애상감에 젖어서 그렇거든요. 조금만 봐주세요. 에헤헤.'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음번에 이 근처를 지나가게 되시는 일이 있으면, .....5백만 루블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시길 바

랍니다!  하하.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아아.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 안의 또 한 명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두달동안 같이 했던 또 한 명의 내가 손을 흔들며 나

갔다. 마지막 대사를 하고 돌아서는 거기에서, 그는 극본속으로, 나는 곧 커튼콜을 하고 뒷풀이를

해야 할 뼈와 살의 세계로, 서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어쩌자고 저렇게 술을 먹나 싶더니만, 이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감동적이었

을까. 그렇게 너희의 마음을 움직였니? 물어보고 싶지만 잔인하게 들릴까봐 저어하였다. 연극, 왜

하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도 한참을 걸려 찾은 답을 녀석들이 쉽게 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답을 찾아내느라 눈물을 훔쳐가며 난처해할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렇게 울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무언가 해 주고 싶었던 말은 있었지만, 더욱들 울 것 같은 대사들이어서 그저

허허허 농담만 하고 말았다.  메롱, 바보들아. 난 너희들이 6회 끝나고 만세만세 하고 있을 때 혼자

나가서 다 울고 들어왔는걸. 히히. 나 우는 건 못 봤지? 난 너희들 다 봤지롱.



이렇게 그 놈들은 연극에 맛을 들인 것 같다. 내가 그랬듯이, 선배들이 자기들도 그랬다고 나에게

얘기해 줬듯이. 또 후배들을 꼬시고 두달동안 술을 처먹어가면서 연극이 뭐니 인생이 뭐니 떠들어

대겠지. 그리고 어느 공연이 끝난 뒤, 연극을 하게 꼬셔 줘서, 연기를 하게 해 줘서, 이 사람들을 만나

게 해 줘서 고맙다고 우는 후배 앞에서 아, 그때 그 꼰대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 그림에 나는 없고자 한다. 틀을 벗기 위해 선택한 연극이 나에게 또 하나의 큰 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깨고 나가서 다시 한 번 자유로운 마음으로 연극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애상감이 자리잡을 자리에 빨리빨리 추억으로 차곡차곡 접힌 기억들을

먼저 채워 넣어 조금이라도 가슴이 덜 아릿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지금 이렇게 기분 꿀꿀하더라도, 연극 왜 하냐는 질문에 멋지게 대답하지 못 하더라도.


그 때 그렇게 커다란 행복감과 만족감이 나를 채웠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난 아마도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했던 것일 테니까.  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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