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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미랑을 말하는 짧고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내 얘기다. 이 곳에 올라오는 이야기들 중 어느 것 하나 내 얘기가 아닌 것

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근래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꾸며가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들게 되어

어쩐지 완벽하게 사적인 이야기는 올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춤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

다. 어쨌든, 이건 내 얘기다.


그리고 이건 미랑이 얘기다. 며칠전 준비해 간 <현대사회와 문학> 발표에서 '잘잤니, 미랑아'로 시작

했던 것처럼, 이 글의 처음도 그녀를 생각하며 쓴다. 결국 이건, 미랑이와 나와의 얘기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그녀의 아버지가 될 분은  권씨였다.그래서 미랑이는 권씨다. 안동 권씨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명문의 후예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던 적은 많지 않다.


태어나기로 결정이 되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랑이는 여자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여자다.

본인은 질색하는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스무살이 넘어서며부터 매력적인 감성에 어울리는 매력

적인 몸매를 갖게 되었다는 평가를 친구의 순수한 호의로 이해할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러나 매력적인 여자이어 왔다, 즉 have been이라고는 쓰지 못 한다.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의

단점이랄까. ) 여자임을 종종 잊게 되던 20대의 초반과 달리, 남자친구가 생긴 1년여 전부터는 나야

말로 여자요라는 듯한 페로몬이 푸욱푸욱 뿜어져 나오는 듯 하여 크게 취한 날 문득 보면 나도 모르

게 혹할 때가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미랑이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다. 얼굴은 뵙지 못 하였으나 미랑이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로 서로

익히 아는 사이이다. 요행히도 이런저런 가치관에서 통하는 점이 있다 하여 묘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 하다. 전화통화 한 번 해 보지 못 한 사람들 중 그렇게 가까이 느끼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근래 이성문제로 크게 고민하는 것 또한 어쩐지 연대의 한 형태인 것 같아 흡족하기도 하다.


미랑이는 승학국민학교 6학년 3반이다. 그리고 눈이 작았었다. 앞뒤 문장이 '그리고'로는 연결할 수

없소,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6학년 3반이면서 눈이 작다면 유치한 별명으로부터 피해갈

수가 없다, 이런 인과관계가 중간에 있음을 안다면 그러려니 하고 납득이 갈까. 아무튼 미랑이는 6

학년 3반이면서 눈이 작았다. 그래서 새우였다.

그 별명을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놀리기만 할 뿐 그 리액션까지 세심히 살펴

볼 나이도, 사이도, 키차이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키가 컸었다. (지금도 큰 편이지만,

친구사이에는 어쩐지 남녀의 구별이 희박해지므로 조금이라도 더 크면 내가 이긴 것이다. 스무살

이후로 사년째 나의 연승 중이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었다. 게다가 열세살의

소년이라면 동경과 공포를, 즉 '외경'을 갖게 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변성기에 들어간 형들만

이 낼 수 있는 목소리로, 그녀는 높은 곳에서 대화를 시도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까지나 맞는 성격인

데도 어찌 어린 시절에는 대화가 적었을까 생각해 보면, 외경과 좌절감이 어우러진 소년의 반항심리

였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미랑이는 인명여고다. '인명여고다'라는 것이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라 하나의 관용적 표현임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승학국민학교 6학년 3반이다'보다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인명여고는 내가 십삼년째 살고 있는 인천시 남구 관교동에 소재한 단 하나의 여고이다. 그리고 승학

국민학교와 담을 같이 쓰는 사이이다. 이것은 '이쯤되면 아시리라' 따위의 말로 너스레를 떨 필요

도 없이 열혈 청춘 소년들의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우게 할만한 설명이 되어 줄 것이다.

한참 성에 눈을 떠가는 열두살, 열세살, 우리의 관심(여기서 '우리'가 누군지는 묻지 말자. 또 다른

네버엔딩 스토리가 시작된다.)은 당연스레 동갑내기가 아니라 완숙미를 내뿜는 인명여고의 언니들

이었다. 단아한 청색의 교복과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 그리고 운 좋은 날이면 가끔 볼 수 있는

체육시간 후의 교실. (수많은 동영상을 섭렵한 지금에도 나는 그때를 떠올리면, ...아, 세상에.)

미랑이는 담 이쪽의 승학국민학교를 나와 함께 졸업하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딘가의 여중을

졸업한 뒤 담 저쪽의 인명여고로 진학했다. 이젠 좀 납득이 가시는가. 이것은 담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미랑이는 '인명여고' 인 것이다. 그 청색의 교복을 입고, 그 구두를 또각거리

며. 체육시간이 끝나고 교실에서 갈아 입었는지 화장실에서 갈아 입었는지는 본 일이 없다.

-어릴 땐 별로 안 친했다며. 그런데 인명여고로 가서 뭐 어쨌다는 거야.

친구, 너무 성급하시군. 더 들어보라니까.

내 첫 소설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게도 비린내 나는 주안의 뒷골목을 내세상처럼 누벼

가던 어린 날이 있었다. 여기서 문장을 그대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문장중의 '주안'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자 코드이다.

주안을 누볐다라는 것은 한달에 한번쯤은 나사 나이트를 갔다는 뜻이고, 보름에 한번쯤은 황금장에

갔다는 뜻이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빠샤 노래방에 갔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 더, 가끔 있는 여고 축

제에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는다는 것이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남구다. 그런데도 청학공고 애들하고 대판 싸울 각오를 해가며 연수구의

연수여고 축제까지 갔던 나다. 하물며 남구의 관교동 인명여고 축제라면야,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인연의 한 실자락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인명여고이기 때문에.


그 축제에서 누가 누구의 모습을 먼저 보았는지, 그리고 그 뒤로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의 우리의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싶다. 여하튼 때는

1997년이었던 만큼 서태지는 컴백홈을 부르고 있었고 우리가 목소리를 나누었던 것은 삐삐이며 그

짧았던 시간의 마지막이 미랑의 '서울대 가서 만나자'라는 편지였던 것 정도는 말해두자. 그 글이

쓰여찐 편지지가 허름한 연습장이었던 건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이상한 생각은 접어주기 바란다. 하긴 남녀사이의 일이 진전되는 것이 무어 이상하게 생각될

까마는, 요행히도 그녀와 나는 오랜 이성친구가 한번쯤은 겪게 마련인 아슬아슬 선타기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한 쪽에 하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2000년, 스무살의 사월. 그녀는 여중과 여고를 졸업하고 꾸준히 한 길에 몰두하려는 신념을 갖게

된 건지 여대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경희대 호텔관광학과 OT 참여생이자 경기도 광주 소재 기숙

학원 등용문 1개월 거주자, 그리고 종로학원 입학 대기자가 되어 있었다. 별로 우여곡절이라고 할

건 없는 이야기의 결과로 만나게 된 우리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웃은 동기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는 그녀는 너무나 달라져서, 그녀가 보는 나는 너무나 똑같아서 웃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년만에 다시 만나던 그 날, 나는 미랑이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종로학원 합격(...그 때는

정말 '합격'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만큼 내 인생의 꿈이었다. )의 전화를 받고 그야말로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짐을 꾸려 알지도 못 하는 곳으로 집밖생활을 하러 떠났다. 그 두어시간이 우리의

'관계'의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스물한두살까지의 지인들은 지겹게 들어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나는 재수를 힘들게 한 편이다. 일일

이 에피소드들을 적자면 이 밤이 새고 말 터이고 그렇잖아도 긴 글을 주욱주욱 내려가며 읽고 계시

던 분은 페이지를 닫으실 것이다. 그래, 그 얘기는 그만 두자. 200원 더 싼 도시락을 사 먹으러 왕복

사십분을 더 걷고, 돈이 모자라 초코파이와 물로 배를 때우며 일년 내 여자들한테 딱 두 번 말 걸어

봤던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정도만. 그게 힘든 일인지 아닌지는 이제 와서는 모르겠지만

힘들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때에, 그맘때쯤에야 겨우 배우게 된 한메일넷에

가끔 들어가 보면 항상 와 있는 미랑이의 메일에는 정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감동'이라는

표현을 그다지 자주 쓰지 않는 편이다. 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그렇게 아껴 둔 그

말을, 그러나 나는 그때를 떠올리면 서슴없이 꺼내어 들 수 있다. ) 재수나 삼수하는 친구들에게 정말

잘 해 주는게 좋을 것이다. 요새는 어설프게 오는 친구의 메일보다는 베이비복스 누드집 스캔화일

이 있는 카페 주인의 초대글이 더 반갑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났었다. 메일 하나로 사람

을 감동시킬 수 있는 거, 재수나 군생활 아니면 힘들다.



스물한살 이후로, 한해한해가 더 해 가면서 나는 점점 더 보헤미안이 되어 간다. ( 그러면서 부르조

아일 수 있는 것은 역시 연대생이라는 특수지위덕분일 것이다. )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그런 연장선상에 놓인다.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오늘 친해도, 1년 후 쯤이면 못 볼 사이 될지도 모르

는 것. 그러다가도 2년 후 쯤이면 또 친해질 수도 있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긍정적인 사고처럼 보이

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기억에서 그 근거를 찾은 것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을 대할 때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더욱이 미랑이는 주위 사람을 자주 챙기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스물한살의 겨울, 같이 연대 합

격자 명단을 보러 연대 공대앞으로 뛰어갈 때의 그 감격적인 이벤트 이후로는 이렇다 할 둘만의

기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도 주위사람을 챙기는 편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주위사람이

되어 보라. 기분 영 아니다. 어떤 때는 한달이나 두달이 넘도록 서로 연락이 없을 때도 없으니 말이다.

(나도 사실 매일같이 보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못 챙긴다.)

그런데도, 미랑이와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친하지만 나중에 안 친해질거라

든지, 지금 전화가 안 온다고 해서 안 친해졌으니 나중에 다시 친하면 된다든지.


미랑이와 함께 있으면 나는 그저 6학년 3반이다.(그렇다고 그때처럼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 도망가

진 않는다. 후우, 우리도 나이를 먹었나, 하고 씁쓸해지는 부분이다. 동심을 되찾는 의미에서 언제

하루쯤 날을 잡아 실행해 봐도 재미있을텐데. )

아니, 더 솔직히 말해, 최대호다. 수많은 연기의 탈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저 최대호다. 미랑이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부터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최대호일 수 있

다는 것. 그리고 그걸 좋아해준다는 것.


나는 이 글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미랑이에 관한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관한 글이었다면

지워버렸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게다가 미랑이에 관한 글이라면, 좋아한다라든지 왜 좋아하는지

에 관한 그 모든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그러면 왜 썼을까. 그냥, 내 친구 미랑이 보고 한 번 웃으라고

썼는지도 모르지. 기분 우울한 날 넘겨서 다시 또 읽어보고 웃어 보라고. 아니면 그저 우리가 술

마시고 했던 얘기 또 하면서도 또 재미나듯이 미랑이의 글에 취해 한 번 더 읊어본 것인지도. 접.


나도 당연히,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것 봐. 새삼스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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