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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7

만시

한시의 장르 중에 만시輓詩라는 것이 있다. 죽은 이에게 부치는 시이다. 말하자면, 받을 이 없는

시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순환하는 이와 기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고서는 애당초 그 성립이 허용되지 않는 문학인 것이다. 그러한, 만시다.


근래 한 수업의 발표를 위해 혜환 이용휴라는 문장가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문장가 둘을

꼽으라면 연암과 혜환이라고 할 정도로 당대의 으뜸가는 문사였지만 아들인 금대 이가환이 서학자

로 몰려 집안이 멸문당한 뒤로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문학사에서 그의 글

을 다루기 시작한 것도 고작 10여년 전이라고 하니 명성에 비해 오랜 세월 받아온 냉대를 짐작할

만 하다.


18세기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파격의 문학이 성행했는데, 혜환은 그 선봉장이자 이후 후학들의

정신적 지주라 부를 만한 문사였다. 특히 산문과 만시에 능했다고 하는데, 수업에서는 커리큘럼 상

산문가로서의 이용휴에 대해 조명하게 되었지만, 실상 내가 절절하게 고쳐 읽은 작품은 대개 그의

만시들이었다. 만시는 그 속성상 매너리즘이나 지나친 센티멘털리즘으로 흐르기 쉬운데, 혜환은

수많은 만시들을 지으면서 (만시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는 것도 특이할 만한 점이다.) 단 한 번도 같은

표현이나 비유를 쓴 적이 없다. 단순히 그것 만이라면 세상에 흔한 재사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내

용에 있어 슬프다거나 그립다 등의 형용사로 바로 표현하지 않고, 슬픔과 기쁨, 생과 사에 달관한

말투로 물 흐르듯 떠나는 사람에게 고개 숙여 말을 읊는다. 당신께서 바라셨던 바는 아니겠지만,

그 장중하면서도 초탈한 마음가짐에 조응한 후학은 그래서 요새 영 마음이 좋질 않다. 수업의 발표

때문에 찾아간 교수님께 요사이의 그러한 고충을 말씀드렸더니, 그래서 사람들이 만시는 연구하지

말라고 하더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그랬나,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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