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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대지

때때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나의 행동을 규제하는 때가 있다. 어떤 것도 내 의지대로,

내 손으로 처리해야 최대한의 효율을 보이는 나로서는 몹시 취약한 면을 보이게 되는 한 때이다.


그런 때에,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어 놓은 행복과 만족의 선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올

라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해 보기 위해 읽어보는 책들이 몇권 있다. 솔제니친의 작품이라든

가 하는 것인데, 어제는 펄 벅의 대지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대지를 읽고 나면 당장 현실의 생활로 돌아오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배부른 고기식사 뒤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파이로 후식을 하듯(물론 나는 그래본 적이 없다. 어디선가 읽고 부럽다, 하며 침을

흘렸던 적이 있을 뿐.), 나는 항상 대지를 읽고 난 뒤에는 아Q정전을 읽어 왔다. 문학전집들 중에서

대지 바로 옆에 있는 책이 아Q정전이라 처음에 그리 시작된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아무튼

그러고 나면 별 영향 없이 일상생활로 스윽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인데, 이번에는 대지의 영향이

좀 컸던 모양이다.


그 밤에 꿈을 꾸었다. 나의 아기가 태어나 팔 안에 들어왔는데, 도무지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목이 아플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다 큰 어른이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하면서도 도무지 울부짖듯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랑스럽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장면이

바뀌었는데, 그 아이가 목졸려 죽어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명백히 대지에서

읽은 표현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이 목의 푸른 손자국. 나는 가슴이 찢길 듯하는 고통을

느끼면서 울지도 못하고 그억그억 소리만 내다가 잠에서 깨었다.


삶은 조금 더 피부에 가까워졌고, 대지는 책장의 내 손에 닿는 범위에서 조금 더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