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3

당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의 연서

배현숙씨.


날씨가 더워졌습니다. 여름밤에 이따금 부는 찬 바람에서도 칼같은 냉기가 아니라 습윤한

색향(色香)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해안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인데, 당신도 아직 인천에

있어 그 바람을 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이겠습니다만, 그래도 맨 앞에서 날씨 얘기까지

돌려 돌려 예의를 차려 두었으니, 그렇게까지 놀라시진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난

지금 피아노와 치---치---소리가 나는 재즈곡을 듣고 있습니다. 아주, 행복하다는 얘기죠.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가 아니고 그냥, 묻고 싶은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나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다니던 인예유치원의 한살 위 친구였습니다. 어찌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여섯살이라면, 여자아이쪽이 훨씬 큰 편일테고, 거기에다 한살 위라면.

몸집 두둑한 여자를 좋아하는 내 취향은 그때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나 보군요. 연상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뭘 보고 좋아해 준 겁니까? 게다가 대여섯살이라면 한참 파마가 물올랐을 때가 아닙니까?

내가 그대로 자라났듯 당신도 그 취향 그대로 자라났더라면, 그다지 만나고 싶어지지는 않는군요.


언제였더라, 무언가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일인가로 우리는 싸웠고, 그것 때문에 당신은 우리

집으로 사과를 하러 왔었습니다. 동생인지 우리의 친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를 옆에 데리고.

사과하러 오는 데에 남자를 데리고 온 것이 엄청나게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그날은 우리

어머니가 평생 해 줬던 김치부침개 중 가장 맛있는 김치부침개를 만들어 줬던 날입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그 김치부침개를, 사과하러 왔던 당신은 깨끗이 먹어 치우고 데리고 온

남자까지 먹인 뒤 돌아갔습니다. 삐진 척 하느라고 방에 들어가 있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겠죠.


그 다음 기억은 이사입니다. 부침개의 날 이후로 화해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하튼 이사를 가는데 당신이 와서 먼 발치에서 보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이 당신에 관한 마지막 기억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그 동네에 계속 살고 있는 외할머니로부터 당신이 미용실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능이 끝나면 한 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덜컥 재수를 하게 되었고, 재수가 끝나고 아차 했던 시점에 그 동네는 이미 재건축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배현숙씨.


결국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오늘까지, 십육칠년이 지난 셈입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우리는

서로 알아보지 못 하겠죠. 하긴 알아보는게 더 이상하죠. 그러나 나는 아마도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당신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눈은 어릴 때부터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으니까요.


들어보세요. 그 이후로 오늘까지, 나는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두자리

수가 안 되는, 그 정도이지요. 그런데, 만났던 사람들의 사진을 주욱 모아 놓고 보면, 웃길

정도로 공통점이 뻔히 보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여자친구부터, 며칠 전 꿈에 또 다시

나와 인사를 하고 돌아간 스물두살의 여자친구, 그리고 요새 항시 몸을 감싸고 있는 감기

기운의 원인인 신촌 국민은행 아가씨까지. 어떤 사람들은 흡사 자매같습니다. 당신도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아, 그런데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사진을 모아 두고 그렇게 추억할 만한

사람들이 나는 요새 너무나 많아 정신을 차리지 못 할 지경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과도 영화처럼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영 고민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 없어 속상해하던 지난 1년동안은 눈에 띄지도 않다가

어디서들 이렇게 나타나는 건지. (한명은 알고 있던 사람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당신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보고 있을까요. 혹시나 가끔 내 이름이 생각나기는 하나요?

기억이 난다면 그 세월의 광막함에, 이름 한자한자가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푹 터지고 말겠지요. 나에게 당신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행복을 같이 나누었을 당신도, 어디선가 재즈를 들으며 가슴 지잉지잉하고 있기를, 마음에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고민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아, 당신을 떠올리기 위해 어린 시절을 똑바로 쳐다보고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오늘로

올라오기 위해 뒤돌아 섰을때, 그 앞에 있는 십육칠년의 시간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지. 배현숙씨. 당신의 언젠가의 그는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