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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렇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 나는 언제나 기분 좋아 보이는 동네 청년이다. 빌린 만화책의 반납일자도 꼬박

꼬박 지키고, 이따금 부당하게 연체료가 물려져도 별다른 군말은 하지 않는다. 동네에 쓰레기가 있으

면 주워 두었다가 쓰레기통에 넣는다. 길을 못 찾는 할머니가 있으면 같이 길을 찾아 드리며 산책

을 하기도 하고, 새로 산 롤러블레이드를 연습하는 꼬마애의 근처에 앉아 이것저것 말을 걸다가

귀찮다고 혼나기도 한다.  혼자서 산책을 할 수 있게 되면 다녔던 초등학교나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

가 앉아서 이것저것 써 보기도 하는 나는 언제나 웃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 나는, '연대생'이다. 옷은 비록 되는대로 주워입고 다닐지언정, 나는 잘 논다.

어디에다 혼자 떨어뜨려 놓아도 재미있게 놀 줄 알고, 새로이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연극을 여섯번째나 하면서 이제는 술을 마시면 제법 어떤 연극가가 어땠느니 나는 연기를

어떻게 생각한다느니 하고 지껄일 줄도 알게 되었다. 정말로 오게 될지 눈꼽만치도 몰랐던 국문과

에서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적응하여 유명한 소설가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대학원으로의 진로를 진지하게 권하시는 교수님도 있다. 신촌에서 갑자기 전화해도

자리를 만들어 줄 술집사장형도 세명쯤은 있고 반년쯤 안 가다가 갑자기 가도 나를 알아 봐 줄 술집

도 열군데쯤은 있다. 신촌거리의 곳곳에는 연애를 했던 추억이 얽혀 있고 새벽쯔음에 심심하면 백양

로를 거닐면서 다음에 노래방 가서 불러볼 노래를 연습하기도 한다.


수많은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두달동안 과외를 하게 된 꼬마의 눈에 비친 내가 있을 테고, 대학교의

2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대화를 나누게 된 동기의 눈에 비친 내가 있고, 택배를 잘못 부쳐 미안해 하

는 직원의 귀에 괜찮다고 씨익 웃는 나의 목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보통 육만원 칠만원씩 하는 장

난감을 파는 곳인데 기껏해야 세일상품인 만얼마짜리를 사 가면서 천원을 깎아 달라는 나를 기억하

는 주인장이 있었을 테고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맞바람을 피우려는 술장난이면 싫다고 방밖으

로 내쳐진 강릉 헌팅녀의 눈에 비친 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 사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하루하루 나는 치열하게

여러가지를 생각한다. 어떻게. 어떻게. 수많은 어떻게로 시작하여 하나하나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내가 현실적이어 보여 싫어지는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흰머리가 빨리 나는 것은 집안의 전통이라

지만 나는 집안의 누구보다도 그것이 빠르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한번에 쭉 읽으면 사실 뭐가

다른지도 모를 법한 저 말들이 실은 서로 얼마나 다른 일인지, 나는 그것의 압박을 아프도록 받으며

산다.



그런저런 생각이 극에 달해 가슴이 뻐근해졌을 때에, 나는 우연히 예전에 즐기던 오락의 사운드트랙

을 들었다. 눈을 감자, 이름이 대호 베자스였던 주인공의 마지막 얼굴이 떠오르고,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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