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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3

나는 인천시 남구 관교동에 13년째 살고 있다. 스무살에는 온통 밖에서 지냈고 대학에 입학한 스물

한살 이후로는 평일은 신촌에서, 주말은 인천에서 보내고 있다지만 그래도 내가 무의식중에 '집'이라

고 말하면 그건 대부분 관교동이다.


그 기간 중 이사를 가긴 했지만 새로 이사를 온 집에서 예전 집까지 뒷짐지고 걸어 봤자 오분도 안

걸리니 나는 과연 이곳을 '동네'라고 여긴다. 곳곳이 기억이 배어 있는 장소.


새로 이사를 온 집(이라지만 이 곳에 산지도 벌써 7년이 됐다.)은 예전 집에 비해 그다지 정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산 건 고등학교의 3년이고 그 기간 중에 하루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이래봐야 대여섯시

간이니. 물론 편하고 좋아하는 곳이지만 추억등을 만들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라는 것이다.


그런 이 집에서도 예전 집에 비해 월등히 좋은 점이라고 여기는 것이,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쪽문을

나서면 쭉 뻗어있는 한 길, 내 임의로 '최의 길'이라고 부르는 작은 산책로이다. 기실 산책로는 아니

고 옆 아파트로 차들이 들어오는, 말하자면 아파트의 입구인데 그 길이 좀 길다. 여름이면 녹음이 지

고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겨울의 새벽에 나가면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설이 나를 반기는 것도

해마다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일이다.


오늘은 때목욕을 하기 위해 최의 길을 따라(잘 읽어야 한다. 잘못하면 죄의 길이 된다.) 만화책을 빌

리러 갔었다. 나는 인내심이 그닥 강한 편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오래 참아내지 못 한다. 오래 몸을 불리지 않으면 때가 많이 밀리지 않아 결국에는 한두시간여나

투자한 내 취미생활이 엉망인 기분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여하튼, 최의 길을 따라 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무얼 보고 있는가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쁜 꽃이

피어 있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새초롬히 피어 있는 것이, 그 속은 귤의(굴이 아니다) 과육과

같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꽃잎은 새빨간 빌로드와 같았다. 쭈그리고 앉아 허어허어 소리를 내

가며 꽃을 보다가 가던 길을 재촉하기 위해 일어섰는데, 내 앞으로 똑같은 꽃이 주욱 줄을 지어 피어

있었다. 세상에,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눌러 막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꽃은 내가 걸음을 시작

한 곳부터 서 있는 그 곳까지 계속 피어 있었다.


과연. 과연.


느낌은 문자로 정의하면 그렇게 정의되고 만다. 두자나 석자의 한자로 멋지게 틀로 끼워 넣으면

좋을 것이나, 그 과정에서 뭉클뭉클한 카오스의 모양이었을 감정의 어느 부분이 잘라져 버렸다면,

나는 굳이 정의하지 않겠다. 디지털 카메라가 있었으면 찍어두었을텐데, 하고 안타까워하던 것도

이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다시 그 꽃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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