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8

김치찌개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돈 쓸 각오만 하면 배를 채울

수가 있었다. 사회인들과 만나면 부끄러운 지갑이지만, 후배 한두 명과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는 것

까지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집에 들어오면 자고 빨래하고 일어나면 병원으로

가고 하는 인천에서만의 생활이 이어지면서 변변한 식사를 못 하게 되어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스스

로 느껴질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러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 오래 전에 배워 두었던 김치찌개를 끓여

보기로 했다. 엄마한테 다시 물어본 레시피는 기억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의 병원 앞에 있는 대형할인점에서 구입해 뒀던 꽁치캔이 있었던 것이다. 칼날이 나왔느니 어쨌

느니 하는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980원에 나와 있는 통에 혹해서 스파게티 몇 봉지와 함께 냉큼 들

었던 기억이 난다.


고춧가루를 넣으면 매워서 못 먹을 것이라는 김여사의 충고가 있었지만 매운 것 먹고 힘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냄비의 맹물에 두 숫갈을 푹 떠서 풀어 버렸다. 김치를 썰어 넣고 설탕과 고추장을 푼 뒤

한참 TV를 보다가 마지막에 꽁치캔을 땄다. 꽁치냄새가 갑자기 코를 찔렀다. 예전 생각이 났다.


재수를 하고 있던 스무 살에 나는 한 해 동안 잠자리를 다섯 번이나 바꾸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실

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말씨 하나까지 조심하던 그 때다. 단체기숙사에도 있어 보고 친척네 집

에 얹혀도 있어 보고 하는 난행 끝에 여름이 지날 무렵에는 학원 근처인 강남구청 앞 고시원에 혼자

살고 있었다. 테헤란로가 지척인 서울 한복판인 만큼 방값은 사십만원에 가까웠고 학원비는 월 백만

원이 넘었다. 좋은 대학에 간 친구들은 과외를 해서 오히려 집에 돈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구청 앞

이라 공무원들이 매일같이 찾는 맛집들이 널려 있었지만 미식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한 끼는 반

드시 라면이나 우유로 대충 마무리하고 저녁은 밥을 먹기로 했는데, 그 때 자주 먹던 저녁반찬이 꽁

치였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밥을 해 놓기도 했고 큰 냉장고도 있기는 했지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다. 사십

개가 넘는 방중에 나와 같은 형편의 재수생들이 여남은 명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테헤란로의 직장

인들을 상대하는 술집의 접대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루 종일 술냄새를 풍기며 샤워실을 두어

시간씩 점령하는가 하면 남의 반찬을 마음대로 꺼내 먹기도 하고, 고작 한 솥 있는 밥을 그릇에 잔

뜩 퍼서는 방으로 가져가 버리기 일쑤였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서는 나도 학원에 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열댓시간씩 공부를 하는 탓에 이들을 하루 종일 관찰할 수가 있었는데, 술집마다 출근 시

간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서로 비번 날을 맞춘 것인지 샤워실과 주방은 단 한 순간도 비는 법이 없

었다. 그러나 그들도, 꽁치캔만은 따지 않았다. 반찬뚜껑을 열어 몇 점을 집어먹는 것은 괜찮지만 남

의 캔까지 따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입에 맞지 않는 싸구려 음식이었기 때문일

까. 아무튼 김도 빼앗기고 김치도 빼앗겼지만, 꽁치만은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었다. 꽁치를 따 반

캔을 기름과 함께 밥그릇 속에 묻어 두고 오 분 정도가 지나 썩썩 비비면 한 끼가 흡족하게 해결되었

다. 그때의 내 또래, 지금의 나보다는 한참 연하일 아가씨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김을 뺀다며 샤워를

하고 해장을 한다며 한 잔씩을 서로 건네는 그 틈바구니에 앉아 움썩움썩 먹던 기억이, 있다. 그리

고 그 때를 떠올리면 항상 코 끝에 꽁치냄새가 난다.


김치찌개는 엄마의 말대로 무척 매웠다. 국물로 한 숫갈을 꽉 채우지 못 하고 반 숫갈만을 들어 그

나마 밥에 비벼 먹는데도 연방 물을 들이켜야 했다. 나는 서툴게 썬 긴 김치 한 쪽을 들고 잠시 고

민하다가 꽁치 한 마리를 통째로 감아 입에 넣었다. 꽁치맛이 났다.

'일기장 > 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오카미  (4) 2008.04.08
사월  (4) 2008.04.01
외할머니  (1) 2008.03.20
안녕 명왕성  (0) 2008.03.09
곤혹  (1) 2008.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