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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근황

방이 건물 외벽과 가장 가까워 외풍이 심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는지, 고시원의 원장 형이 전기 장

판을 줬다. 덕분에 요새는 누워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여가며 장판에 허리

지지는 것이 하루 중의 가장 긴 일과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기를 쓴지 1주일이나 지난 것은 몰랐다.

괜찮은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연구실로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아 올릴 수가 없게 됐다. 오늘은

지난 한 주간 있었던 일들을 글로만 간단히 적으려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지난 주말 인천을 찾아 겨울옷들을 챙겨왔다. 부피가 커서 여러 벌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장 몸이 따뜻한 것 말고도 어느새 눈에 설어진 옷들을 다시 걸치고 나서는 것이

무척 기분 좋다. 엄마가 새 청바지를 사 줬는데, 지퍼가 아니라 단추로 앞섬을 잠그게 되어 있어 소변

을 자주 보는 편인 나로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새 옷 입는 재미에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하

다가, 며칠을 보낸 지금에는 그냥 열어놓고 옷으로 가리고 다닌다. 바람이 들어와 사타구니가 시릴

정도가 아니면 학문을 향한 이 마음처럼 활짝 열어 놓는다.


일요일 저녁에는 이제 결혼을 사흘 앞둔 허 신랑과 만났다. 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그간의 추억에

안녕을 고하고는, 서른을 두 달 앞둔 사내놈 둘이 노래방을 찾아 조용필의 꿈과 카니발의 그땐 그랬

지를 눈물 흘리며 불렀다. 이 날의 이야기는 함께 찍은 사진이 워낙 잘 나와서 나중에 사진과 함꼐

더 쓰고자 한다. 아무튼 축하한다 허 수. 이젠 기혼자를 포함한 모임에 어울리는 음주 공간에서 다시

만나자.


월요일 밤에는 '미어캣의 모험(원제 The Meerkats, 제임스 허니본 감독, BBC, 2008)'이라는 다큐

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미어캣은 사막에서 나란히 열을 맞춰 두 발로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털 빠

진 고양이나 두더쥐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데, 이 영화는 어린 미어캣 한 마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성

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나레이션과 함께 보여준다. 배경이 되는 칼라하리 사막이 워낙 척박한 곳

이라 다큐멘터리를 구성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서사를 고민하며 이야기를 구성한 상업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전개에, 호기심 많은 주인공 '콜로'

가 마침내 일족에 꼭 필요한 구성원으로 자라나 망을 보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동해서 눈물이

났다. 이 영화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시간을 내어 관람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화요일에는 논문 본심을 앞두고 계신 예비 석사학위 소지자 이 선생을 만나 논문의 초고를 읽고 들

었던 생각들을 전해 주었다. 요새는 성품이 많이 순해져서 누가 내 글의 흠결을 지적하면 고개 숙이

고 고맙다고 인사하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분한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심성이 넓고 천성이 낙천적인 이 선생은 글 쓰는 이가 가장 지적받기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인 맞춤

법에 대한 이야기 등도 선선히 받아들이고 답례로 카레까지 사 주었다. 역시 석사는 그냥 되는게 아

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제인 수요일에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만났던 수인 형과 3년만에 재회했다. 현대백화점 앞에서 만

났는데, 서울의 다른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덜 했을 것이지만 내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신촌에서 인

생의 가장 꿈같았던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과 포옹하고 있자니 정말 일상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많지 않다는 형 때문에 형과 친하다는 다른 이가 한 명 동석하여 마셨는데, 2차까

지는 신촌에서 마시고, 3차는 나와 동갑인 형의 지인이 좋은 데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태원으로 갔다.

도착한 곳은 러시아 미녀들이 상주한다는 광고문구의 바였는데, 색달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막

상 술집 안은 100여 평의 넓은 홀에 띄엄띄엄 소파들이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인천의 술집이었다. 이

미 올 한 해 중 가장 떡이 되도록 마셔서 몸이 힘들기도 했고, 러시아 미녀들은 사실 흑발의 고려족들

이거나 러시아 출신이라는 것만 사실인 이들이어서 나는 대체로 소파에 늘어져 싸구려 댄스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작 그 술집을 소개시켜 준 친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서, 그저

앉아서 맥주 네 병만을 마셨을 뿐인 수인 형과 나는 십오만 원을 내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알고 보

니 우리와 말도 하지 않고 아가씨들이 연방 홀짝거리던 오렌지 주스 한 컵의 가격이 만 원이었다. 하

다못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으면 분하지나 않았을 것이다.

신촌까지 택시를 타고 와 한 잔만 더 하자는 수인 형을 다시 택시에 밀어 넣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요사이엔 리쌍과 다이나믹 듀오, 자우림의 신보를 내내 듣고 다니는데, 서른이 되어 입대

하며 부른 다이나믹 듀오의 '청춘'이라는 곡에서 '우리네 아버지처럼 흐르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졌어'라는 가사에 마음이 꽂혀 이슬비 내리는 새벽에 편의점 밖에 앉아 이름모를 비싼 맥주를 한 병

더 마셨다. 이 날 돈이 얼마 나갔는지는 계산조차 하기 두렵다.


숙취가 엄청나서, 저녁 다섯 시에 서당에 가기 전까지 하루 종일 장판 위에 누워 동강동강거리며 책

을 읽었다. 후일 강의를 할 때 유용한 자료로 쓰일 것이라 생각해 구입한 '만화 중국서예사'는 풍부한

도판 외에는 그리 볼 것이 없었지만, 반 값 할인에 혹해 구입한 진중권 씨의 '서양 미술사'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근래 신각이가 추천해 준 '동과 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의식구조'라는 개념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양미술사의 흐름 중에 다큐 '동과 서'가 주장하는 내용과의 접점을

많이 찾을 수 있어 좋은 공부가 되었다.


술독이 다 안 풀렸는지 아직도 명치 있는 데가 욱신욱신하긴 하지만, 토요일 결혼식의 사회 문구를

쓰기 위해 연구실을 찾았다가 밀린 일기를 몰아서 쓴다. 각각의 내용에 해당하는 사진을 차차 올리기

로 하고, 오늘은 이렇게 있었던 일만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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