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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근황

논어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과외를 그만두기 전 마구 구입해 두었던 레고들을 만들었다 부수

었다 하며 놀고 있다. 몇십년이 걸릴지 모를 한자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척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사실 더 부담이 되는 것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운전면허 기능교습. 더 이상 미루면

못 딴다며 직접 학원에 가 등록까지 해 오신 어머니에게 등을 밀려 어영부영 시청각교육을 받고

오기는 했지만, 과연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유산소운동만큼이나 오래 된 기계와의 악연이 다시 한 번

맹위를 떨칠까 걱정된다.


국민학교의 여섯 해동안 매해 만들었던 고무동력기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날아간 적이 없었다. 졸업

을 앞두고 있던 6학년 때에는 -심지어 탐구생활에 포함된 숙제거나 대회가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반드시 성공해 보리라 마음먹고 방학을 맞아 혼자 세 대나 만들었던 적도 있다. 결국 지금까지의 인생

의 마지막 고무동력기가 되었던 최대호 3호는 약 2m를 비행한 뒤 장렬히 전사하였다. 93년 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소년 최대호는 무수히 실패한 라이트 형제처럼 주저앉아 머리를 싸 쥐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오락은 p2p로 받아 돌리면 그만이지만 5.25 디스크 여남은 장이 있어야 인스톨을 할 수 있

던 때가 있었다. 프린세스 메이커나 어스토시아 스토리, 퍼스트 퀸 4 등, 오늘날 30대를 바라 보는 청

년들의 유년기의 기억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을 그 이름들. 그러나 두근거리며 디스크를 빌려 와

넣어 봤자 내 컴퓨터는 항상 오류를 토해 냈다. 옆에서 기다리던 다음 친구에게 넘겨 주고 수시간이

지나 전화를 해 보면, 그들의 집에서는 또 멀쩡히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토요일 오후 학교에 남아 있어 하고 싶은 어린이는 없었기에 선생이 억지로 내보낸 라디오조립

경진대회에서 나는, 참가자 전원이 조립을 마치고 퇴교할 때까지도 -남들이 쓴 땜납의 두배를 써 가

면서도- 완성을 하지 못 했다. 끙끙대며 결국 어찌어찌 얽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아폴로 13호가 달 뒷

편에서 보내 오는 듯한 소리만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다. 그 대회에서 나는 그 해 특별히 신설된

'노력상'을 수상하였다.



운전면허 시험에 대한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 놓으면, 주위의 면허증 소지자들은 대부분 막상 해 보

면 쉽습니다, 라고 위로를 해 온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감사

한 마음이 아니라 '막상 해 본 순간'의 기억이다.

말년에 야간당직근무만을 일삼던 나는 어느날 만만한 반장이 잠 든 틈을 타 순찰차를 몰고 인근을

돌아 볼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교통계에 근무하는 현역 의무경찰이 무면허로 운전을 하다가 적발

되면 적어도 지역신문 사회면의 구석쯤은 화려하게 장식할 사건임은 알고 있었지만, 근무지였던 영

종공항은 새벽에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데다 제대를 한 달 남겨 놓고는 영창에 가지 않는다는 규정

또한 알고 있었기에 계획할 수 있었던 만행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 인쇄해 둔 운전시동요령을 손에

든 채로 두근두근하며 순찰차에 시동을 걸고 부릉 나가던 나는 그대로 전방 45도 방향의 기둥을 들이

받아 버렸다. 콩트에서나 보는 상황이지만, 당황하여 무언가를 눌렀는지 밟았는지 아무튼 뭘 했는데,

나는 뒤를 보고 있었지만 차는 기둥으로 다시 돌진해 버렸다. 진땀을 흘려 가며 겨우 차를 다시 주차

시켜 놓고, (그나마 나중의 디테일한 주차는 내려서 밀며 했다. 여러분, 로체는 무겁다.) 나는, 나 자

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 평생 면허를 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무튼, 이제 며칠 후면 그 운전을 제대로 배우게 된다. 총 일곱 시간의 시청각 교육이 끝난 뒤 나는

혼자 멍하니 수십대의 차량들이 개미처럼 꿈틀거리는 석양의 기능연습장을 바라 보면서 제길,

괜히 1종 신청했네, 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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