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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귀가 막혔다.

정확히는 귓구멍이 막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귀걸이를 걸기 위해 뚫었던 귓볼 어딘가의 구멍이

막혔다. 지난번 귀걸이를 넣을 때에 어쩐지 불안불안하더라니, 드디어.


방학은 언제나 귀걸이라이프의 최대위기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배가 심상치 않은 사이즈다 싶

으면 속도위반했겠거니 하고 씩 웃음짐작하고서는 잠자코 있는 것처럼, 우리 집에서 내가 귀를 뚫

은 채로 있는 것은 일종의 금기화제이다. 동생을 군에 보낸 이후로는 조금 변하셨지만 아버지는

멋진 쾌남아이시다. 집밖에서 밤새 술을 퍼마신다거나 약간의 여성편력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납득해 주시지만 그런만큼 당신의 기준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시다. 그 외의

이런저런 이유로, 인천에 계속 내려와 있는 방학중에는 아예 귀걸이를 빼놓고 지낸다. 다른 방학때에

는 종횡무진으로 여행을 한달쯤 다니다가 곧 서울로 올라가 연극준비를 시작했던 탓에 잠시 빼두었

다가 이내 끼워 놓고 잊고 사는 편이었는데, 이번 방학부터는 휴학이라 어쩌지어쩌지하던 차에 막혀

버린 것이다. 드디어.


눈을 좁게 뜨고 되돌아 생각하면, 처음 귀를 뚫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무료한 날이었다.

그러한 풍조가 있었던 다른 도시의 여러분의 경우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살고 있던 인천에서 남자

고등학생이 귀를 뚫는 일이란 정말로 드물었다. 역시 촌이라 그랬을까. 여하튼 무언가 남과 굉장히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극적이라 충동적으로 뚫어 버린 것인데, 하루에도 몇차례씩 두드려

맞는 전근대적 학교에서 그게 걸리고 무사할리가 없지. 곧 무수히 두드려 맞고 양호실에 가서

약지에 후시딘을 병아리 고추만큼 발라온 뒤 선생들 앞에서 무릎꿇고 직접 귀에 치덕치덕 치대야

했다. (근래 '치대다'의 다른 용법에 대해 배웠으나 여기서는 일단 사전적 의미로 통해둔다.)


이후 스무살에 집밖에서 재수생활을 하며 뚫어 두었던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인데, 나름으로는 차례

차례 지나간 귀걸이들, 그리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지만서도, 무엇보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스스로의 외양을 꾸미며 크게 즐거워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어느정도 좋게

보기는 하되 사람으로서 누구나 즐길 법한 정도이다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그런 터에 남들도 그

리 많이 하지 않는 귀걸이치장을 굳이 했던 이면에는 역시나 촌놈이라 무시받기 싫다거나 따로이 남

에게 보일 것이 없으니 꾸민다는 식의 반동적 컴플렉스가 숨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막히면

어쩌나라고 걱정하면서 그리 걱정하는 자신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인데, 이제 사오년이 지나 더 이

상 귀에 귀걸이를 걸어 둘 수 없게 되었음에도 스스로 흡족한 다른 면들이 생겨나 더이상 구애받지

않게 된 것이 기쁜 것이다.


그래도 몇년을 뚫려 있었던 것, 밀어 넣으면 피 약간 나고 다시 걸어 볼 수야 있겠지. 어느날은 너무

도 귀걸이가 하고 싶을 수도 있을테고. 일단은, 한 번 막혔는데 거기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는 하나

로 만족하고 넘어간다.


아, 귀걸이. 몇년동안 재미있었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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