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장/2002

광복절 특사



나은누님의 선심으로 광복절 특사를 봤다. 경아야, 미안하다. 우리 딴 거 보자꾸나. 재미있는 거

많잖니. 화내지 마라. 선배의 명령이로다. 화내지 마. 명령형이다.  ...어흣 민망해.


'광복절 특사'. 야후에는 111개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저 사진을 가져온 이유는,

...이유가 뭐 있냐. 차승원 사진 가져 왔으면 이유는 차승원이지.


'신라의 달밤' 때만 해도 괜찮은 엔터테이너다, 라고 생각했고,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작품속에 묻

히는 모습을 보고 '배우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근작 '광복절 특사'에서의 그의 연기는 나를 경직

하게 했다.


별로 좋지 않은 연습법이라는 지적을 들은 뒤에도, 몸에 배어 있었어서 그런지 인상적인 연기를

보면 무의식중에 따라하게 된다. 오늘도 그래서 같이 간 나은 누나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주의하며

차승원과 설경구의 연기를 따라해 보았는데, 아, 차승원, 그의 연기에 빠져서 쳐다 보느라고 따라

하지 못 하고 놓친 순간이 몇 번이나 되었다.



나도 세 번의 연극경력 중 두 개가 코미디이다. 당장 이력서를 쓰면서 주력 장르를 쓰라고 하면 짤

없이 코미디를 써야 할 판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 코미디에 대해 갖는 일종의 환멸같은 것이

있었다.


연극에 관한 한 가장 오래되고 간결한 정의를 내린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한단계 낮은 사람과

자신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해, 못난 놈 보고 자신의 잘난

면을 새삼스레 인식하며 흐뭇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도 인간이다. 그에게 관객을 웃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한 그는 동시에 관객을 휘어잡고

자 하는 욕망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무시받는 것을 거부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자존심을 갖고 있는 배우들을 잘 알고 있다. 눈앞에서 연기를 지켜본 적도 있다.

지금 여기서 바보인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알아둬라, 평소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아주 짧은 제스추어라도 그들은 그러한 우월감을 비추어 자신의 지위를 낮추는

것을 막는다. 그런 연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배우는, 나다.

나에게는 소위 '망가지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배우로서 가장 치명적인

결점으로 지적받고 있고, 근래 배우로서의 나에게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그러나 나는 문득 생각하였던 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혹은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에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선이 있는 것은

아닌가. 속으로 진실로 느끼지 않아도, 테크닉만으로 타고 넘어야 할 연기인가.



그것이 오만하고 철저하게 자기합리화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살아있는 연기를 통해

배웠다. 그렇다고 정확히 무엇을 배웠는가를 적을 수는 없다. 설명하기에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복잡한, 하나의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적을 수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집에 오는 내내 숟가락을 잡고 오열하던 그의 연기를 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연기는 진실했고, 관객들도 진실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는 진지하게 연기를 해서 자신의 연기력을 뽐내었고, 그로 인해 관객을 자연스레 웃기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었다.  



신촌에서 인천터미널까지, 주위 눈치를 슬핏슬핏 보아가며 혼자 해 본 것이지만, 빵을 먹다 오열하

는 씬이나 숟가락을 잡고 우는 씬을 따라하며, 어쩐지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절로 눈물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배우로서의 기쁨이란, 진실로 이러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는 차승원을 엔터테이너로 부르지 않겠다. (신라의 달밤 2가 나오면 재차 고려해 볼 일이지만.)



-근래의 글들 중 가장 정리되지 않은 글이지만, 하다 못 해 훗날의 나만이라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그대로 올린다. 문자로 정리해 내기 위해 내 이미지를 편집하거나

다듬고 싶지 않은 순간인 것이다.

'일기장 > 20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기의 공연을 보다.  (2) 2002.11.28
주안에 가다.  (4) 2002.11.27
답사를 다녀오다.  (4) 2002.11.24
송지희님  (1) 2002.11.22
엣다 보미야.  (1) 200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