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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계절을 잊기에는 1년이면 충분하다.

아침나절에는 대학생들 때문에 번잡스럽고 저녁무렵에는 직장인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헬스클럽은

밤에 가기로 한 것이 꽤 되었다. 아홉시 무렵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가려다 아무 생각 없이 반바지를

긴 바지로 갈아 입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평소 좋아하는 '최의 길'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나는 눈치를 채지 못 하고 있

었다. 그러다가, 아웃백 사이드 메뉴 고구마의 맨 안쪽 부분과 버터를 놓아 두고 다른 부분을 살금

살금 긁어먹다가 최후에 한 포크 푹 떠서 몽땅 먹어 버리듯이,


가을이, 눈과 코와 피부의 앞에 펼쳐졌다.


-어떤 누나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웃긴다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고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면서 그 난리를 치지만, 여자는 사계四季를 타고 있느라 조용히 있는

것 뿐이라고. 엇, 그런가 하고 밤새 조용히 술만 홀짝거렸던 그 기억, 어쨌든 생각만 났지 별 상관은  

없었다.


작년 가을은 잘 모르겠지만, 재작년 가을에는 분명히 '나는 다른 남자들보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편

이다'라고 썼던 것이 기억난다. 살면서 밤중에 더워서 깬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그 폭염의 여름

도, 접한지 삼분여도 안 되었을 가을 앞에서 몽땅 추억으로 날아가 버리고, 나는 주위사람들의 시선

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뒤로 벌린채 잠자리마냥 뛰어 보았다. (가 근래 시작한 어깨운동 탓에

어깨가 시큰거려서 금방 멈추었다.) 나의 가을이 아니라면 내가 어느 계절의 어느 때에 이런 미친

짓을 해 보겠는가.


길을 걷는 도중에, 나는 여러가지 기억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문득 어딘가를 보고 '아, 그런 일이 있

었지...'하고 웃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휙 돌아가 버리는 것

이다. 크림을 담뿍 탄 커피같은 한 때가 아니라, 격렬하게 끓고 있는 콩비지탕같은 한 때라 해야 옳을

것이다. 1997년의 받아들여지지 못 한 편지, 1998년의 술먹고 돌아오다 잃어버린 컬러렌즈, 1999년

의 첫사랑과 함께 보았던 가을의 별, 2000년의 눈물, 2001년의 난봉일기, 2002년의 굿닥터 연습 중

귀가, and so on, and so on, 그리고 그 느낌을 혼자만 갖기 위해 일부러 찾아 들어간 골목길에서,

나는 참기름 냄새를 맡고는 한참이나 웃었다. 이런, 추석이잖아.


다 까먹고 있었네. 과연, 계절을 잊기에는 1년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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