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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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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 시. 짬이 났다. 삼사 일을 내리 놀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기껏해야 점심을 먹기 전까지의 한

두 시간 정도이다. 대학원은 중간고사 기간에 수업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읽어야 할 자료들이나 제

출해야 할 과제가 없기에 잠깐 난, 짬이다.


수업과 관련된 일이 없다고 짬이 나는 것은 아니다. 호구를 위해 맡은 일들이 또 따로 있다. 요새

의 가장 주요한 수입원은 조선의 통신사와 그를 맞이한 일본인이 남긴 필담筆談의 원문 입력 작업인

데, 꽤 큰 뭉치를 마무리해서 넘긴 것이 어제 새벽이다. 프로젝트의 담당 선생님께서 오늘 오후나 밤

쯤에 다음 작업을 지시하실 때까지는 잠시 해방이다. 액수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액이라도

더 벌기 위해 맡고 있는 조교의 일도, 오늘 오전 열 시 2교시 수업에 들어가 검사를 마친 학생들의

한문 숙제를 나누어 주고 점수를 공표함으로써 일단 중간고사 이전의 업무는 마쳤던 것이다. 그리

하여 짬이 난, 오전 열 시다.


빨간 펜으로 틀린 곳을 체크한 한문 연습장을 나누어 주고, 선생님의 추가 지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연구실로 왔는데, 무엇을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할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공관련 교양을 위해 빌려다 놓은 책도 두꺼운 것만 예닐곱 권과, 얼

마 전 학생회관 앞에서 대 할인을 하길래 돈 생각 안 하고 집어든 약 십만 원 어치의 책더미가 책장

한 칸을 꽉 채우고 있었다. 쓰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새로 사 놓은 편지지도 서랍 한 가운데에 있고,

언젠가 그림으로 그려 봐야지 하고 따로 폴더에 저장해 둔 사진들도 수백 장이 넘었던 것이다.


한두 시간의 짬도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니다. 지난 주에는 결방되었지만 명랑 히어로는 여전히 꼬박

꼬박 챙겨 보고 있고, 많이 자는 날은 심지어 아홉 시간이 넘게 뒹구적거리는 일도 있다. 아마도, '무

언가 해야 할 일이 없는' 짬이, 한 달 여만에 처음으로 난 것이다.


짬의 느낌이 이렇게나 생소한데, 학기가 시작한지 고작 한 달 뿐이었던가 하고 멍하게 된다. 게다가

중간에 추석도 있었는데. 마음의 여유를 얻고 자신의 인생과 세상사에 대해 관점을 갖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는 이 직업의 최대 장점이라고 언제나 큰 소리 뻥뻥 쳐 왔는데.


근래에 일기가 적었던 것도 이 탓이라 여긴다. 쓰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는 승

호의 감동적인 집들이가 있었고, 읽다가 눈물이 날 뻔한 옛 글이 있었고, 실제로 눈물이 나 버린 가

을 노래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 하는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못내 속상

해 하면서도 일기장에 한두 줄 끼적거리고 말았던 것인데.



기실의 나는 좀, 뻔한 사람이다. 생색 내는 것을 좋아하여 눈에 띄는 일들을 맡아서 하는 것이 감추고

살려 노력하는 나의 본성이다. 당연히 누가 보지 않아도 혼자 꾸준히 해 나가는 지구력은 가장 먼

덕목이라 해도 항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곳이 살아 있어 좋았다는 윤선이 형의 한 답글은, 고맙

기는 하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아마도, 무슨 생각을 하기에 앞서, 이미 내 몸이 나는 쓰는 사람이라

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것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혹은 많은 사람이 보고 아무

도 칭찬하지 않아도, 평생을 호흡과 같이 해 나갈 나의 근본이다. 한 편의 만족스런 일기를 쓰려면

최소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걸린다. 힘들게 낑낑대고 서울까지 와서, 혹은 인천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목욕탕에서 쪽잠을 자고 와서, 그 시간이면 과제가 한 편이고 원문 입력이 수백 자인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이제 좀 써야겠다. 반성하자. 반성하면 고치면 된다. 이것이 모자란 자의 미덕이다.


짬은, 터지거나 갈라져 생긴 틈이라고도 한다. 모든 일상을 평평하게 만들고, 어떤 것에도 슬퍼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감사해할 줄 모르는 스스로의 틀을 잡아 찢는다. 올 가을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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