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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4

K군에게






K군.


잘 지내고 있겠지. 잘 못 지내고 있다고 해도 내가 별달리 해 줄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혹시 맞출 수 있겠나? 내가 요새 자주 보는 만화책의 조연인데 말이야.

실루엣등으로 미루어서 한 번 맞춰보게. 5월맞이 독자서비스 정도로 여기고 말이야.


내일모레 아침 열시에는 탄핵기소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TV에서 생방송으로

보여준다는군. 자네도 별 일이 없으면 꼭 보라구. 난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볼 생각이야.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오는구면.


내방에는 작은 화이트 보드가 있어. 집에서 과외수업을 하던 시절에 원활한 강의를 위해 사다 놓았

던 것이지. 난 시각훈련을 중요시하는 사탐선생이었거든. 관교동의 사최라고 하면 나름대로 유명했

던 시절이 있었지. 아무튼, 근래 일년정도는 학생의 집에서 수업을 했던 터라 수업용으로는 쓸 일

이 없었거든. 그래 심심하면 낙서를 해 놓기도 하고, 다음 날 꼭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놓기도 하고,

뭐 그랬던 거야.


꽉 차서 더 이상 쓸 곳이 없어지면 지우곤 했던 것이라 지우기 전에 손을 뒤로 모으고 가만히 구석

구석 보고 있으면 뭘하고 살았는지가 대충 보인다고. 그런데 요새는 어떤지 아는가, K군? 응?

기껏해야 자기 전까지 하던 오락에서 다음 미션에서 할 일을 적어놓고 잔다든지, 자기 전에 생각난

보고싶은 만화책 이름이라든지, 아무튼 생각이라고는 도무지 없어. 오늘은 별 생각 없이 그냥 놀기

삼일째였는데, 써 놓을 핑계거리를 찾다찾다가 그만 빗소리듣기라고 써 놓고 말았어.


별생각없이 쉬다보면 뭔가를 하고 싶은 에너지가 생길 줄 알았거든. 아직도 더 쉬고 싶은 것인지,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인지 아무튼 이렇게 하루하루 의미없이 소일하고 있다네. 복권당첨의 꿈만

꾸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또 복권 사기는 귀찮아서 미루고 있고.


뭔가를 쓰고 싶은데 뭘 써야 할지 모르는 기분을, 자네는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내가 딱 그꼴이야.

학생들이 들으면 원성을 내뱉겠지만 말이야, 난 차라리 지금 누가 레포트라도 내 줬으면 하는 심정

이라네. 글쟁이가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알지 못 해 다른 사람에게 주제를 청하는 이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이것참.


역시 그런 거야. 왜,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씨가 연기했던 편집장 있잖은가. 모든 인문학도들의

이상향이라고 할 만한 그 인물말이야. 그 편집장이 박해일 형을 앞에 앉혀 놓고 그런 얘기를 하잖

아. 작가가 되려면 가슴에 깊은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게 없어서 작가가 못 된다고.

요새처럼 그 말이 절실한 적이 없다네, K군. 절실해. 몇편 써 두었거나 구상했던 건 결국 내 상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는데, 그걸 다 써먹고 나니 더이상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일부

러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으니, 이걸 도무지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인문학도의 모델이라니, 또 하나의 인물이 생각나는군.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감우성 형이 연기했

던 인물 말야. 자네와 난 의사 이 나쁜놈들 돈많다고 정화누님이나 빼앗아가고, 에이 썅썅거리면서

같이 보지 않았나. 마치 온 인문학도가 내 형제자매인양. 실은 사회학부 떨어져서 인문학부에 온

거면서 말야. 어쩌면 돈많은 의사남편한테서 뜯어낸 돈으로 용돈을 주는 여자가 나한테는 없기 때문

에 화를 냈던 건지도 모르지. 게다가 나와 완전히 동일시하기엔 우성이형 몸이 너무 실했거든.

그렇지, 우성이형 몸은 좋다기보다는 실하다고 표현해야 더 어울릴 거야. 응? 좋다와 실하다의 차이

가 뭔지 모르겠다구? 그러니까 자네 엉덩이 사이즈가 그 모양인거야.


뭐, 비가 와서 그냥 별 생각없이 잡담이나 해 봤어. 오늘이 지나면 화이트보드에 또 뭘 써야할지,

벌써부터 고민되는군. 건강하길 바라네.



                                                                                                 2004. 5. 12. 崔大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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