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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6월 10일



-광화문 앞의 컨테이너에 네티즌들이 합성으로 여러 가지 글귀들을 적어 넣었다. 출처 프레시안.




어제 밤 한 시부터 어청수 경찰총장의 지시로 광화문에 컨테이너로 방어벽이 쌓였다고 한다. 오늘 새

벽-아침의 글들을 검색해 보면, 출근길에 큰 불편을 겪은 시민 논객들이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이나

화물연대의 파업주도자들이 쌓은 것으로 오인하고 ‘취지는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논조로 쓴 블로그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공간에 올리는 글인데 정확한 정보

를 갖고 올려야 할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폭발적인 역동성과 함께 앞으로의

발전까지 모색되는 이러한 미증유의 선진적 정치 축제에, 설마 국가 공권력이 이 따위의 작태로 대응

하리라고 누군들 짐작이나 했을까. 서울로 오는 버스에서 옆사람의 신문에 실린 컨테이너 사진만 흘

끗 본 나도 축제무대로 쓰려는 요량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연구실에 와 기사를 검색해 보고는 어안

이 벙벙해졌다. 정말, 일 크게 만드는 것으로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걸물이다. 이 조치가

오늘의 대집회에 얼만큼의 폭발력을 실어 줄지, 후에 올라올 기사들을 보기에 앞서 저녁 일곱시 무렵

인 지금 일기를 쓰고 있다. 혹여 시민의 에너지를 거대하게 분출시킴으로써 요즈음의 흥분 상태를

일단 가라앉히려는 특종의 전략일까도 생각해 보지만, 지금까지의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정도의

지능을 가진 위인은 아닌 듯 하다.


집회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걱정하는 언급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가 거두어지

지 않았을 경우 딱히 주도세력이 없었던 이번 집회의 성격상 그 열기가 천천히 수그러들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정치판에서, (대단히 비참한 말이지만)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 민주당은 아직도 정체성을 찾지 못 한 채 이번 일련의 쇠고기 사태에서 남는 떡고물을 주

워먹기에 혈안이 된 듯 하고, 이번 사태를 통해 인지도를 크게 높이긴 했지만 진보신당은 아직도 너무

약하다. 종교계 원로들에게는 -애당초 그들의 말이 정치적 파급력을 크게 갖는 편도 아니지만- 지

난 번 대통령과 가진 담화에서의 뻘소리들로 미루어 보아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할 듯 하다. 학

자들 중에서도 실질적인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대개 조중동 측에 있어 차라리 없으면 해악이라도 끼

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현재에 있어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는 세력은 일부 블

로거-논객들과 인터넷 신문들 정도 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논거와 논지에 있어 지속적인

신뢰를 보일 만한 수준에 접근해 있는가 하는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조중동에 비하면 접근성이 지나

치게 떨어진다. 백분토론도 한 시간 늦춰진 판이니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기가 어렵다.


아울러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일당이 챙기게 될 반사이익에 대해서도 우려가 된다. 그의 정치적 신념

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근래의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능력에 대해 대부

분의 국민이 크게 실망한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것인데, 이런 분위기라면

이후에 이뤄질 현안처리들에 있어 이명박 정부가 평균치만 해 줘도 용인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친박 일당이다. 현재 박근혜는 -명백히 이번 사태의 수박 겉핥기식 해결

책으로- 총리직을 권유받고 있는데, 단기적으로는 반사이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박근혜로서도 고민

이 되는 상황일 것이다. 만약 박근혜가 경선에 승복하고 2인자로서 한나라당 내부에만 있었더라도,

작금의 상황은 박근혜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 있었다. 사태가 장기화됨으로써 현 정부의 신뢰도

가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구원자 이미지로 나섰다면 한나라당의 ‘적통’이 다시 한 번 서는 것이고, 국

익과 관련없이 그의 정권승계는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렇게도 염원하던 ‘보수 총결집’의 화려한 부

활이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는 친박 연대라는 괴 정치 집단을 형성해 탈당을 한 상태이다. 복당 이야기가 나오

고 있지만 한나라당에서도 일방적으로 모두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현재 박근혜의 오른팔이거나

혹은 심복이 아니라도 정치적 영항력을 가진 인사들이 전부 복당되지 않는다면 탈당은 현명한 선택

이 아니라 단순한 세勢줄이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

하고 청와대의 구조요청을 그저 관망만 하고 있다가 -가정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이명박이 현 사태

를 ‘나름대로 슬기롭게’ 해결했을 경우 박근혜의 몸값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혹여 복당을 한다 하더라

도,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한 이명박이 당내 후계자로서 박근혜를 선택할 가능성도 더욱 낮아지는 셈

이다.

따라서 현재 박근혜에게 주목되는 시선은 다분히 단기적인 반사이익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예상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박근혜가 과감히 총리직을 수락하고 일련의 회유책들을 사용하여 현

사태를 일단 진정시키는 것이다. (친박 연대가 진심으로 조약을 철폐시킬 수 있지 않느냐, 왜 박근

혜라면 일단 삐딱하게 보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국에서 조약 철폐를 부르짖지

않고 이명박과 같이 덤태기를 쓸 미련한 정치인은 없다. 조약 철폐를 내걸었다고 해서 친박 연대의

정체성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쇠고기 이야기에 쓸려 묻히고 있지만, 친박 연대에서는 현재 종합부동

산세 축소 법안을 준비중이다.) 이 경우 국정운영부재는 이명박 개인에게 쏠리게 되고, 박근혜와 한

나라당이 ‘경제는 역시 한나라당’ 따위의 프레임이라도 내 걸 경우에는 재앙이 5년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각종 비리로 얼룩졌으며 심각하게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구축한 자민당이 ‘그래도 경제는

자민당’으로 일본에서 몇십 년을 해 먹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전경련,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소위 ‘경제 5단체’는 오늘 ‘시위 장기화에 대한 경제계의

입장’이란 성명서에서 ‘세계의 눈과 여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서울의 한복판에서 이루어

지는 과격시위는 우리의 대외신인도에 심각한 과격을 주게 되며...’라는 언급을 했다. 서태지와 아

이들도 모르는 여중생들부터 전쟁을 체험한 기성세대까지 ‘촛불’이라는, 서정적이며 평화적인 상징

성의 기제 아래 모여 있는 장면과 수도의 도심에 용접한 컨테이너로 국민에 대해 방어벽을 쌓는 정권.

어느 쪽이 국제적 수치가 될 것인가를 굳이 다시 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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