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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8

4월 16일 수요일. 시청에서 재령과 수와.

지난 주 수요일의 일이다.


정명기 선생님은 갑자기 날이 좋으니 야외수업을 하자고 하셨다. 학생은 나까지 넷이라 자리는 중요

하지 않았다. 천천히 위당관에서 내려오며 이야기하다 자연스레 상대 앞 풀밭에 앉았다.


시절은 그야말로 봄이었다. 해가 갈수록 절정의 봄보다는 꽃들이 꽃눈에서 피어날락 말락 하는 음란

한 초봄을 좋아하게 되지만, 어느 때의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감탄하고야 말, 그런 봄이었다.

야외에서의 수업이라 드문드문 섞여드는 선생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러나 출연하는 인물들은

모두 국문학계의 거장들) 을 들으며 눈을 좁게 뜨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멀찌감치의 벚꽃나무가

꽃잎을 비처럼 뿌리우는 것이 마치 동양화 같다가, 내 쪽으로 바람이 불자 점처럼 보이던 잎들이

점차 질량감을 가지며 3차원의 세계로 산화하는 것은 입을 다물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나무의 그늘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도, 매일같이 다니는 학교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지는 장면

이었다.


수업은 예정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끝났다. 근래의 가정사를 전해 들은 선생님은 헤어지며 ‘최 선

생, 힘내시고 다음 주에 봅시다’라고 말씀하셨다. 학부 때부터 보아 오던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지만,

대학원에서 처음 만난 다른 선생님들은 석사 1학기의 나한테까지 모두 최 선생이라고 불러 주신다.

의례적인 호칭이겠지 짐작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마다 해 놓은 것도 없는 주제에

괜히 우쭐해진다.


백양로를 걸어내려오며 동기인 재령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재령이는 시청역 근처에 있는 삼성

네트웍스에 근무하고 있는데, 신촌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차라도

한 번 마시자는 이야기를 해 온 터였다. 전화를 받은 재령이는 전날 회식이 늦게 끝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약속을 잡아 주었다. 오늘은 만나기 싫은 모양이구나 생각하던 나는 그

기이한 타이밍에 놀라며 무척 즐거워졌다.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과의 대화란 언제나 즐겁지만 재령

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출나달까, 아무튼 인물이다.

소울 브라더 허수군이 근래에 같은 회사인 삼성 네트웍스에 입사해 삼성역 근처에 있는 본사에서 교

육을 받고 있는데, 교육이 끝난 뒤에는 시청 쪽 지사에 있는 같은 팀으로 들어와 재령이가 하던 업무

를 이어받게 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 허수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셋이 꼭 같이

보면 좋을텐데 혹 바쁘면 어쩌나 하는 내 생각과 상관 없이 다섯 시에 퇴근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참, 영원하여라 삼성.  


시청으로 한 번에 가는 버스는 결국 찾지 못 했다. 다행히도 같은 2호선이었기 때문에 지하철로 가도

별달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수업이 끝난 것이 열두 시 무렵이었고 신각이와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라 시청에 도착했었도 시간은 고작 네 시를 넘겼을 뿐이었다. 삼성역에서 다섯 시에 출발한다는 허

수와 일곱 시에 퇴근하는 재령을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인근에 갈 만한 곳

이 어딜까 하고 지하철 안내판을 살펴 보니 들러볼 만한 명소가 꽤 있었다. 시립박물관은 입장료

가 있을 것 같아, 덕수궁으로 향했다.


덕수궁도 입장료가 있었다.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몇 년 전 렘브란트 전시전을 본 것이 덕수궁이었던

것을 기억해 냈는데 그 때에는 티켓에 덕수궁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이어폰

을 끼고 있었던 탓에 한참 걸어간 뒤에야 뒤에서 부르는 검표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성인은 천 원.


혼자서 가방 하나 메고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자니 인도에서 혼자 유적 사이들을 걸어 다니던 기억이

났다. 낮부터 좋았던 날씨도 어디 안 가고 해서, 나는 나무나 고궁을 만져보며 한참을 걸었다. 고궁

건축에 관심이 많은 후배 원영군을 데리고 왔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텐데, 하고 중얼거

리면서도 혼자 이런저런 추측들을 해 보는 것 또한 나름의 풍취가 있었다. 한 바퀴 다 돌고 나서

‘광명문光明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종 앞에 앉아 편지를 한 통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물을 관찰하고 싶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도에서부터 든 습관이다. 애초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 하고 시작했던 것인데 의외로 그 물체를 자세하게 보고

더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뒤로는 딱히 때를 가리지 않는 취미가 된 터였다. 마침 스피커

에서는 바로 옆에서 뜯는 듯한 가야금 연주곡이 나와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와가

너무 많아 그리다 말고 짜증이 났다. 그림은 결국 완성하지 못 했다. 펜화는 내 취향이 아니야, 하고

신 포도 취급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허수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허수를 기다리며 꽃집에서 꽃을 한 다발 샀다. 재령이가 쏘기로 약속은 되어 있었지만 언제나 보험

은 필요한 것이다. 두 정거장 전이라던 허수는 금세 나타났다. 회사원이 된지 한 달이 넘었건만 할아

버지 넥타이는 여전했다. 핀잔을 주었더니 최신 트렌드의 얄싼한 넥타이를 했다가 윗사람에게 지적을

받았다고 했다.


먼저들 들어가 있으라는 재령의 말에 응응하고 우리는 놀래켜 주기 위해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허수는 와 본 적이 있어 어느 빌딩인지 기억하고 있다며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로 나를 이끌

었다. 로비에는 앉을 곳이 없어 우리는 서서 이야기를 했다. 허수의 새로운 생활과 나의 근황등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고 났는데도 재령은 나오질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소녀

의 목덜미처럼 꼿꼿하던 꽃은 복날 견공의 불알마냥 축 늘어졌다. 마침내 재령의 내려온다는 전화를

받고 놀래켜 줄 준비를 하던 우리들은 너희 어디에 있느냐는 전화를 한 번 더 받고서야 다른 건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후에 듣기로 삼성네트웍스는 두 건물에 입주해 있었는데, 허수가 찍은 것이

하필 다른 건물이었던 것이다. 재령이는 심지어 맞는 건물의 정문 앞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뒤에서 나타났다. 옆문으로 나왔는지 어쨌는지. 꽃다발까지 동원된 동기간 감동의 이벤트는 피곤한

다리의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어느덧 여덟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수도 재령도 집이 멀고 다음날 아

침에 출근을 해야 했기에 열 시에는 끝내야 했다. 동기간에는 같은 잔수만 쨍하는 불변의 진리를 무

시하고 자기 쨍하고 싶을 때마다 쨍하는 간특한 사회인일랑 버려 두고, 수와 나는 달렸다. 계산을 끝

내고 고깃집에서 나온 바로 다음의 기억이 고려대 앞 홍기의 방에서 눈 사이로 스며든 아침해일 정도

로, 열심히 달렸다. 얼핏, 허수와 함께 택시를 잡아 타고 이십대 초반처럼 서로 마구 욕지거리를 해

대던 것이 기억나는 듯도 하다. 재령의 섹시한 나풀나풀 실크 블라우스도 기억이 나는 듯 마는 듯.

필름이 끊긴 채 옷을 벗어 던질 때에도 나는 양말만큼은 가지런히 벗어놓아 다음 날 아침의 나를 웃기

곤 하는데, 머리맡에 제멋대로 널부러진 양말이 기억나지 않는 지난 밤을 두렵게 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보니, 홍기에게 주려고 인천에서부터 싸 간 오이김치가 들어 있었다.

엄마가 퇴원하고 새로 담근 것이 하도 맛있길래 혼자 사는 홍기한테 주려고 하루 종일 가방에 넣고

돌아다닌 것이었다. 후에 들어보니, 내 손으로 넣은 것인데다 근황까지 말하고 잤다고 한다. 어릴

적엔 필름만 끊겼다 하면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해선 안 되는 일은 악착같이 해 놓더니, 이젠 좀 철이

든 것일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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