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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9

4월 10일

열한 시에, 귀에 익지 않은 알람을 들으며 일어났다. 목욕탕에서 자기 휴대폰의 알람 소리에 깨기란

로또 급은 아니지만 예전 학교 앞 엿 뽑기의 잉어 급 정도이다. 어제 밤 새벽 세 시를 넘겨 연구실에

서 내려 오면서 할 일이 많은 다음 날이니 바로 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지만, psp에 담아 두었던 추

격자를 보는 바람에 다섯 시가 넘어서야 눈을 감았던 터였다. 오랜만에 다시 보아도, 좋은 영화였다.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국민 은행을 찾았다. 교통 카드로 쓰고 있던 체크 카드를 어제 분실해서 재발

급을 받으러 간 것인데, 혹 누가 그 사이 긁어 대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던 걱정일랑 헛되게시리 잔

액은 그대로 있었다.

신입인지, 앳된 얼굴에 잔뜩 화장을 한 여사원이 입구에서 엇박자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이 귀엽기도 하지만 숙련되지 않은 그 품새가 좋아 보여 한참을 흘깃흘깃 쳐다 보다가, 7-8년 전

에 마음에 드는 은행원 누나를 보러 매주 그 은행을 찾던 것이 떠올라 파안대소하였다. 만원이라도

억지로 만들어 입금하고는 잡지 따위를 뒤적거리며 꾸물거리는 내게 웃어 주던 그 누나는 이제 마

흔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겠지. 부디 행복하게 살아 주십시오.


은행을 나와 휴대폰 대리점을 찾았다. 영창 갈 각오하고 상경도 달기 전에 부대로 반입했던 지금의

휴대폰은 어느덧 세 살이 훌쩍 넘었다. 어떤 사진이나 편지보다도 그 때를 생생히 기억나게 하는,

지우기가 아까운 문자들을 하나 둘씩 쌓다 보니 총 280칸의 저장 용량 중에 고작 두세 칸의 여유

공간만이 남았다. 꽉 차 있는 것을 깜빡하고 있다가 중요한 새 문자를 못 받거나, 마음맞는 이와 문

자랠리라도 하게 되면 바로 전의 문자를 일일이 지우고 다음 문자를 쓰느라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이

기도 하고. 이런 불편함이 있었는데도 굳이 바꾸지 않고 있었던 것은 달갑지 않았던 군생활 중 최

소한 하루에 한 번이라도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던 그 모양새가 눈에 정겨워서였다. 궁여지책으로 문

자를 하나하나 카메라로 찍어 보았지만 화면으로는 글씨를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어쩐다 귀

찮다 하는 와중에, 무엇이 화근이었는지 배터리 용량이 어느날 갑자기 줄어들어 버렸다. 진솔하거나

재미있는 대화는 둘째치고 학교에서 하루 중 몇 통 정도는 하고 받아야 하는 일 관련 전화들조차

원활히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은행까지 나간 김에 휴대폰 대리점을 찾았던 것이다.

이전에 쓰던 기기는 반납하지 않고 새 모델을 구입하는 것임에도, 생각하던 것보다는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24개월 할부가 의무사항이라고 하니,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보았던 모델들을 집어 보아도 대

개 달에 만 원을 넘지 않았다. 곧 실행해야겠다는 확신은 섰지만 아무래도 즐겁지는 않았다.


연구실에 짐을 풀고 청경관에 점심용의 샌드위치와 저녁용의 김밥을 사러 갔다가, 이미 부산에 내

려 간 줄 알았던 배정현 군을 만났다. 계란과 우유를 사러 왔다길래 굳이 손을 잡아다가 계산을 해

주었는데, 돈이 없는데 형 신세를 지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그냥 웰빙 간식을 사러 온 것인데

배짝 마른 모양새에 내가 괜한 노파심을 낸 것인지, 더 좋은 걸 먹으래도 굳이 그것만 집고 말았다.

안녕, 하고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영 별로였다. 집 밖에 나와 배 곯는 놈들과 나이 먹고 군

대가는 놈들만 보면 하루종일 코끝이 징-징-한다.


연구실에 잠시 앉아 공부를 하다가 군대 간 희승이에게 책 몇 권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으로 갔다. 군

시절 '연세대학교'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으면 보낸 사람에 한 번, 소인에서 살아나는 학창 시절의

추억에 다시 한 번 기뻤던, 각별한 추억이 있다. 제대하면야 제가 읽고 싶은 것 사서 읽을테니 지금이

라도 이런저런 책들 접해봐라 싶어 하나로 통일하기 어려운 주제의 책들을 넣었다. 백범일지나 논어

같은 건, 이쪽 전공으로 마음을 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군이 아니면 평생 읽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계속되는 목욕탕 생활에 몸이야 진즉 지쳐 있었던 터이지만 슬슬 마음이 치이는 탓에, 고시원을 좀

알아 보았다. 마침 미선이 누나가 학교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가격이 낮은 고시원을 추천해 주

어 찾아가기로 했다. 연희 삼거리로 걸어가는 길에 정은 헌책방이 있어, 근래 계속 숨어있는 책만

가기도 했고 마침 프로젝트의 마지막 월급이 지급되었기도 했고 해서 두어 권 사 볼까 하고 들렀다

가 크게 남는 장사를 했다. 신간으로 구입했어도 아깝지 않은 책들 여남은 권을 계산대에 쌓았는데

도 총액은 고작 사만원 남짓. 읽을 것과 선물할 것을 두 봉투에 나눠 담았다.


고시원에는 이십칠 만원 짜리와 십사 만원짜리의 방이 남아 있었다. TV도 냉장고도 필요 없거니와

이십칠 만원씩 낼 바에야 신촌 한복판에 살고 말 것이라, 내 덩치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십사 만원

짜리 방을 잡았다. 이십 만원의 예산을 세우고 간 것이니 발품 팔기를 잘 한 것이지만 정작 방의 상

태는 결코 고운 곳만 전전한 역사였다고는 할 수 없는 내 잠자리 방랑길에서도 하의 하 급이었다.

뭐, 잠만 자면 됐지. 짐을 싸 일요일에 들어가기로 하고, 계약금 만 원을 걸었다. 방값의 무려 십사분

지 일이다.


시간은 세 시 반. 평소에 학교서 다섯 시 반 쯤 출발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이른 것임은 알

았지만, 연희 사거리까지 나갔는데 학교로 돌아가면 도리어 시간 낭비이고 마침 민추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는 길이라 새로 뽑은 교통카드를 삑, 긁고 버스 좌석에 앉았다.

한 차례 갈아타는 지점인 세검정에는 북한산 자락에서 이름모를 개천이 흘러온다. 마음이 동해, 평

소 같으면 언제 오나 언제 오나 동동 발만 구르는 7022번이 몇 대가 지나가도록 세게 불어도 따뜻한

바람을 맞으면서 한참 물살을 쳐다 보고 있었다.


민추에 도착하니 네 시 반. 눈을 감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눈을 뜨고는.


다음 주의 숙제를 위해 읽고 있던 한 박사 논문을 꺼내어 펼치고 다시 어제 밤까지 계속 되던 일상

을 이었다. 빨간 볼펜으로 죽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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