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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4. 싸움에 휘말리다.



                 <사건 이틀 뒤에 찍은 사진. 아직도 팔뚝에 싸움의 흔적이 남았다.>


1. 여기는 오르차. 카주라호로 가는 중간도시인 잔시에서 카주라호행 버스를 눈앞에서 놓친 탓에 이

리로 왔다. 여러가지 불행이 계속해서 겹치는 인도여행. 오늘은 마침내 싸움에까지 말리고 말았다.


2. 카주라호에는 기차역이 없기 때문에 인근의 도시인 잔시의 기차역에서 내려 카주라호행 버스를

잡아 타야 한다. 잔시역에 내린 시간은 13:25. 약간의 흥정 끝에 버스스탠드까지 가는 오토릭샤를

잡아 탔는데, 달리는 도중 카주라호행 막차가 언제 있냐고 물어 보니 뻔뻔한 얼굴로 13:40이라는

것이 아닌가! 가이드북에는 적어도 15:00까지는 탈 수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빨리 달리면 Rs10을

더 주겠다고 하자 오토릭샤는 속도를 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서두르다가 삼거리에서 그만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를 건드려 쓰러뜨리고 만 것이다. 사실 풀썩, 하고 살짝 넘어졌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대로 가자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인도남자가 뛰어와 내가 탄 오토릭샤의 운전사의 따귀를

철썩철썩 때리는 것이 아닌가. 엄청나게 세게, 그리고 자연스레 때리길래 나는 아는 사람인줄 알

정도였다. 그렇게 이삼십대를 때려 대던 그 남자는 마침내 운전사를 끌어 내어 바닥에 패대기치고

밟기 시작했다. 거기에만도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나는 갑자기 주위에 게으르게 누워 있던 대여섯명

의 인도인들이 달려와 같이 걷어 차는 것을 보고 넋이 나갔다. 총을 든 인도경찰은 멀리서 히죽거

리며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었고 운전사는 마침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버스는 지척에 있어, 고마

웠다, 하고 돈을 던지고 달려가면 잡아타지 못 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

제일 뿐 생전 처음 보는 인도놈이라 해도 나를 태우다가 맞고 있는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어쩌지 어쩌지 하며 보고 있는데 넘어진 오토바이의 주인인 듯한 남자가 씩씩거리던 그 기세 그대로

주위를 둘러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3. 그것은 직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힌디어로 뭐라고 떠들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두 내 쪽

으로 향하게 했는데, 비록 다른 언어라도, 아마 이 놈이 빠르게 달리게 했다, 라는 내용일 것이라고,

나는 피부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게 될, 그러한 직감.

내리자마자 사기를 당하고 인도 전역에서도 가장 사람 질리게 한다는 아그라에서 방금 빠져 나온

나는 몰릴 때까지 몰린 기분이 되었다. 경찰은 여전히 웃으며 지켜 보고 있었다. 재빨리 일단 오토

릭샤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인도놈들 중의 하나가 세게 밀었다. ( 이때 뾰족하게 솟은 철 부분에

찡기는 바람에, 이 날로부터 이틀 후에 찍은 위의 사진에까지 멍이 남게 된 것이다. -편집자 주 )

이 아픔이 공포와 긴장감을 분노로 전환시키는 스위치가 되었다. 정신이 나간 나는, 스스로의 공

부를 위해 인도인이 알아듣든 말든 언제나 완성된 문장으로 영어를 사용해 오다가, 최초로 한국어를

내뱉게 되었다.

이 개새끼들, 나 한국 안 가, 다 때려 죽이고 나도 한국 안 가,

등의 말을 두서없이 연발하며 손에 감고 있던 체인으로 한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리 세지도 않

았는데 그 녀석은 어깨를 잡고 고통스러운 듯 쓰러졌고 다른 녀석들은 깜짝 놀란 듯 물러섰다. 경찰

도 황급히 달려와 나를 말렸다. 경찰이 중재를 하려거나 인도놈들의 편에 섰더라면 나는 아마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머리를 차갑게 만들어, 나는 덤비려던

놈들을 쏘아보며 체인을 되감았다. 운전사는 피를 흘리며 오토바이 주인에게 사과하고, 버스를 놓친

데 대해 내게 사과했다.


4. 가이드북에는 잔시에 관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의 오르차로 오게 되었다. 일정이

틀어졌고, 게다가 이 시기의 인도에서는 보기 어렵다는 소나기까지 내리기 시작해 정말 기분이 거지

같았다. 숙소의 꼬마는 방을 보여주고 Rs250을 달란다. Rs100을 주겠다니까 그러면 Rs150에 흥정

하자고 한다. 전부 이런 식이다. 다시 화가 났지만 지쳤기 때문에 그냥 묵기로 했다. 조용히 방에만

있다가 내일 카주라호 가는 버스를 타야지 생각했는데, 아까 마을 입구로 들어 오며 흘끗 보았던

유적지가 멋있어 나가 볼까 고민 중이다. 일기를 쓰다가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도마뱀 열댓

마리가 후두둑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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