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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2002년 9월 15일 일요일

뭐랄까, 이 공간을 보다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꾸며보자는 의도도 있고, 너무 비쥬얼한 면만 강조

해서 진짜 심심풀이삼아 스윽 들러보는 건 아닌가에 대한 경각심도 있고. 좋아하는 한 형의, 일기에

대한 얘기를 읽고 난 뒤 나름의 생각도 있고.

그래서 어쨌든 여기에도 오로지 문자라는 텍스트만으로 한 번 꾸며 보려고 합니다.


올라갈 것은 주간영화잡지 씨네 21에 실린 글을 보고 생각난 것들을 적어본 근래의 글입니다.

황신혜밴드인가에 있는 김형태씨의 칼럼인데, 뭐랄까, 그 나이 먹어서까지 그렇게 네가티브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 대단해 보이고 한편 한심해 보이는 야릇한 글이라 즐겨

읽습니다.  여하튼, 언제 어디서든 딴죽을 거는 걸 지켜 보기란 즐거운 일이니까요.


징그럽게 깁니다만, 이렇게 처음부터 해 놓으면 다음부터는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어지간한 긴 글도

올릴 수 있을 터이고. 뭣보다 이 공간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몇의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생각을

조금 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논점일탈의 엉망인 글이지만 올려 봅니다.

(글 중간에 나오는 '트루먼'은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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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한 미술대학 선배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결국'이민을 갔다.

한반도 남단에서의 삶을 딱 40년 채우고서는 중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우리는 축하할 일

도, 아쉬워할 일도 아닌 복잡한 기분으로 그 선배와의 마지막 밤을 덤덤하게 보냈다. 그 마지막 밤

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절망의 경험들,

부질없음과 가망없음, 시지포스처럼 반복되어야 할 의미없는 삶의 쳇바퀴에 대한 반감들. 그리고

이제 또다시 도전할 불확실한 희망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들. 가늘게 떨리며 두서없이 풀어내는 그

이야기들을 그저 들어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해 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젠장, 이제는 모두 알고 있다. 희망의 나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정말 끔찍한 것

은 지국가 둥글다는 것이다. 그렇다. 지구는 둥글다. 아무리 멀리멀리 떠나도 결국 제자리에서 맴

돌 수 밖에 없는 동그란 공 하나의 표면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건설된

수없이 많은 국가들과 시스템과 정치와 경제구조들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뉴질랜드에서도,

호주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매일매일 설거지는 해야 하고 집세를 벌어야 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

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고 그것을 유능하게 척척 잘해내고 그 성과 자체에 삶의 가치를 둔다면 삶은

그렇게 고단하기만 한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삶의 비극은 개인의 자아가 꿈틀대는 순간에 시작된다.



  자신이  일개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리고 아주 치밀하고도 계획

적인 교육을 통해 일개미로서 세뇌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채는 순간 삶은 슬픔을 넘어 분노와

적개심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 원흉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거대하고도 끔찍한 시스템을 창조하고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

고 집단 취면을 걸어 일개미처럼 만들어 놓고, 아파트와 월급봉투만 보장해 주면 행복해하는 존재

로 만들어버린 그 원흉이 보이질 않는다.


  벗어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삶에 있어서 게으른 태도를 가진 불평분자의 푸념일

뿐인가? 천만에. 바보가 아닌 이상 속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 얼

마나 덧없이 소모되고 있는지 당신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여기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이상, 이 지구상에 설치된 사회적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되도록이면 심란한 의심은 들춰내지 말고 이 안에서 어떻게든 행복을 찾

아보자는 게 서로를 위한 예의일 수도 있겠다.


  트루먼은 노를 저어  나아갔다. 그리고 시스템의 방벽 끝에 도달했다. 아아, 세상의 끝이라니 그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나도 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세상의 끝이 있기만 하다면.

10년이 걸리든, 한평생이 걸리든 노 저어 나아가리라. 정말로 지구가 둥근 것이 아니고 평평한 지평

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의 문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

가 내 삶의 어떤 갈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 선택의 기로를 찾아 기꺼이 떠나가겠

다. 그 여정이 멀고 힘들지라도. 혹은 가다가 늙어 죽을지라도.


  지구는 인간의 유배지.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적응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일정량의 노동을 해야

한다. 물론 운동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감옥도 생각하기에 따라 안락한 삶일 수 있다.



  하지만,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 '빠삐용'이 스스로 시인한 자신의 죄목은 '인생을 허비한 죄'였음

을 기억하는지....


                                                                     <씨네21> 352호,  p123,  김형태.



  개인적으로 짐 캐리의 여러 시도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트루먼 쇼>로 시작해 이해하기 힘들었

던 <맨 온 더 문>, 그리고 최근에 보았던 <마제스틱>까지, 그의 행보는 계속하여 평단과 (주류)관객

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지만 마흔의 나이에, 앞으로의 인생의 한 침로라고까지 생각한 '진지한' 연기

를 그가 쉽게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미국에서 40세 이하의 가장 부유한 40인'에 뽑힌 경력이 있다니,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

은 판단이라 조금 무게가 덜할 법도 하다. 그러나 자신에 관한 비판은 그것이 비록 미세한 것일지라

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쓰라리기 마련이다.-


개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트루먼 쇼>. 앞으로도 적을 생각이지만, 모든 일 또는 모든 물건의

가치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나에게 갖는 효용성에 있다. 짐 캐리의 진지한 세 작품 모두 이런저런 부

문에서 작품 자체로는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트루먼 쇼>는 오랜만에, 영상매체를 통해 접한 물건 치고는 드물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

다.  그 생각에 관한 것은 위에 옮겨다 붙인 글과 거의 흡사하다. (지구는 둥글다 어쩌고는 지나치

게 감상적인 듯 하지만.)


그래도 글줄을 희롱하는 재미를 안다라는 놈이, 남의 글을 옮겨 쓰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

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남의 글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문필의 방향이 나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데

에 있다. 물론 이것은 변명일 수 있다.


'왜?'는 철이 들 무렵부터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화두이다. 어째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

면 무기력해졌다.


내 생각에, 고등학교는 대학교로 가기 위한 입시기관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입시기관치고는 너무

허술했다. 떨어지는 강사진과 실제로는 대학입학에 필요한 내신산출에 들어가지 않는 각종 과목

들, 등하교에 들어가는 시간. 그래서 나는 강력히 자퇴를 주장했었다. 그때 돌아다녔던 여러 고시원

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말들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결국 부모님의 눈물에 막혀 접고 말았다.

소중한 친구들과의 기억이 엄청나게 쌓여 결과적으로는 보다 나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계

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일을 내 인생의 몇가지 '실패'중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왜'라는 질문은 기존가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이미 있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 뿌

리깊은 의심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은 분명한 도전이다.



도전은 녹록치 않다. 세상에는 언제나 기득권층은 강력하다라는 논리가 있다.



  호칭, 연애, 연극, 여행 등등, 스물한살의 나에게는 온통 재미난 일 천지였다. 나는 그 모든 일들에

의문을 던지면서 때로 비록 고통스러웠을지언정 내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무엇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가? 왜 나는 이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그것은 나를 여러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편집시키는 것, 혹은 세상을 나의 기준에 맞추어 변화시키

려는 시도. 나는 내가 가장 관심있어 하는 '왜?'는, '소통'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모든, 자신에게서 밖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은 곧 소통이다. 비록 그것이 시작된 나의 의도가 아

닐지라도, 밖으로 보여지는 내 모든 것들은 소통일 수 있다. 소통은 곧 청자에게서 시작되어 청자

에게서 끝나기 때문이다. ("끝난다'라는 것은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이 의아하다면, 아무도

듣지 않는 고등학교 때의 국사수업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교수행위'라는, 너무도 명백한 소통행

위이지만, 피교수자가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소통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과의 소통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돌고래가 지구에서 인간을 키우고 있다는, 어릴 적 봤던 만화책의 충격적인

설정을 반쯤은 믿는다.-  나와 같은 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애석하게도 모든 시발점과 귀착점

은 '나'인 것이다.)  그것도 나와 같은 시대, 비슷한장소를 살아 온 사람. 그런데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과 나의 생각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신적 교미를 연상시키게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마음을 열고 말한다, 라는 것은 이래서 소중하다.  매우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러나 모든 소통이 타인과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자신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할 때가

있다. 어느 누구도 가장 빛나는 순간의 나에게 박수쳐 주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다.

모두 각자 '자신의 삶'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때로 빛나는 우정이 있고, 가끔 나를 향한 사랑의 밀

어들이 있을테지만 '어차피'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인간은 혼자이다. 많은 순간 혼자이다. 그 혼자인

순간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지 않기 위해, 자신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혼자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아는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

싸여 있을지라도 인간은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의 틀을 바꾸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소통'의 주체는 말하고 있는 다른 사람

이 아니라 듣고 있는 내 자신이다. 나의 태도에 따라 나를 둘러싼 상황 혹은 세계는 나에게 끊임없

이 말을 걸어 오고 있는 훌륭한 소통의 재료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겪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말하는 '열린 마음', 트루먼에게는 노를

저어 가 만난 '세상의 출구이자 다른 세상으로의 입구', 그리고 내가 말하는 이른바 '날것'으로서의

마음.


그렇다. '날것' 인 것이다. '날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

그것은 비유만으로도 징그러울 수 있다. 게다가 날것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주위에 상당한 불편을

초래한다. 다들 어느 정도의 예의를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장소와 대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 따라 자신의 말을 편집할 수 있는 예의. 조작된 상황에

서 자신의 뜻을 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타이를 수 있는, 그리고 남들과 암묵적 계약을 맺을 수 있

는 그,   예   의  .


그러나 이러한 예의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 책임은 화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백히 청자에게 있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는 좀처럼 변화하기 힘든 존

재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 '예의'라는 것은 좁은 장에 달린, 안으로 여는 문과 같다. 장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문을 잡아당겨 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문을 만들고

장이라는 공간을 더욱 좁게 하는 것은 자신이다.  그럴수록, 밖에서 보기에 문과 장은 견고해 보

인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닌 사람' 혹은 '뚫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친해지기

힘든 사람'등은 대개 이러한 종류의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날것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장도 문도, 물론 나에게도 있겠지만, 먼저 다른 사람들의

문을 열어볼 것. 비록 그들이 자신의 공간을 좁게 하는 문에 대해 불평할지라도, 그 문밖에 나오면

무한한 공간이 있을 거라고 설득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러한 시도를, 소통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때로 곤혹스럽다. 먼저 문을 열고 다가간다는 것, 인간은 이것에 '안

심'하기 쉽다. '저 사람은 내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 줄거야.' 얼마나 교만하

고 영악한 종인지...그러나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종인 것을 어쩌랴.  그들에게, 비록 자신들을 좋아

한다 할지라도 나는 안심하지 않고 받은 만큼 돌려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나

의 몫이다.  자신을 채워 나가는 것,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남들에게 여겨지게 하는 것, 이것

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소통에서 가능하며, 이 자신과의 소통을 도와주는 것이 다시 한 번 '날것'이

다.


'왜'에서 '소통'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트루먼 쇼>가 조금 소외되어 버렸다.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이유도 '소통'과 <트루먼 쇼>의 중간쯤에 있다. 연극은 부단한 나와의 소통

이다. 굳이 재엽옹의 말을 빌지 않아도, 나는 연극을 통해 다른 인생을 살면서 내 자신을 해방시킨

다. 이것은 문학적 미사여구가 아니다. 그 순간,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장남으로서의 나, 연대생으로서의 나, 스물두살으로서의 나, 그 모두에서 기대되는 행동양식들로부

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곳 <트루먼 쇼>와 연결된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고 싶다. 속으면서 살고 싶지 않다. 연대의 유수한 과를 졸업하고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삶을 세상

에서는 성공한 삶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연 누구로부터 인정받은 성공일까.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

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성공에 대한 이미지는 과연 누구로부터 출발한 개념일까.  

나는 내가 규정짓지 않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연극이 올라가고, 내 차례가 오기전 무대뒤에서,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미칠 것 같은 긴장에

서 오는 쾌락의 순간에,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명쾌한 문장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가 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의, 무의식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것 같은 대답에

근접해 있는 느낌이 든다.


연극은 하나의 사례일 수 있다. 아주 작게는, 내 인생에 도움 하나 될 것 없어 보이는 수업을 땡땡

이치고 청송대에 앉아 후배 한 명과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로부터 크게는 내 인생 전체를 규정짓는

요소들 중의 하나일 직업의 선택까지.  돌아보지 않겠다. 이제는 날것으로 살아 가리라.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위해. 내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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