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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2

11월 21일 토요일





긴 하루였다.


뒤바뀐 생체 사이클 탓에 비척비척 일어 난 것이 새벽 세시 반. 예전에 만들다가 내버려 두었던

세계 최초의 전기 자동차 다이무러 카를 완성하고, 반쯤 읽다가 침대 옆에 덮어 두었던 갖가지

책들을 모두 읽어 책장에 다시 꽂고, 먼지 쌓인 10여년간의 크리스마스 카드들을 다시 한 번 읽고

난 뒤 아침식사를 했다.

집에서 나서는 길 엄마가 우악스럽게 주머니에 5만원을 우겨 넣어 줬다. 죄많은 대학생은 그저 다른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시험시간이 되어갈수록 마음은 편해지고 몸의 컨디션도 괜찮아졌다. 시험도 뭐, 준비 안

하고 땡땡 놀았던 거에 비하면 경천동지할 정도로 잘 본 편이고...   다만 이번 시험 최대의 변수가 될

것이라 예측하고 소설내 인물들 상관관계표까지 그려가며 공부하였던 이광수의 '무정'에서는 딸랑

두 문제 나왔다. 선생님 거짓말쟁이! 다섯문제 낼 거라고 그러시고선! 분하다. 박응진에 삼랑진에

김종렬 별명인 검나까지 외웠는데. 비교적 평이한 문제들이 나왔다. 특이한 문제를 예측하는 능력은

더이상 없나보다. 박응진 꼭 나온다고 외우게 한 사람들 미안.



시험이 모두 끝난 것은 세시. 지난주쯤부터 놀다가 시험보러 학교오고 하는 생활을 반복해서 그런

지 별로 야-방학이다! 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시험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영전이형을 만나 오랜

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도 연애에 대단히 만족하는 듯 하여 시샘이 났다. 망년회를 하

기로 한 멤버들 중 반 정도가 신촌에 저녁쯤 온다고 해서 어딘가 시간을 보낼 곳을 물색했다. 적당

히 구석진 곳도 있으면서 고픈 배를 달랠수도 있고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보이지 않을 곳. 셋은 그

래서 피자헛을 찾았다.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두어시간 정도 즐

겁게 환담을 나누었는데, 배가 부르고 몸 주위가 따뜻해지면서 전날의 피로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정영성, 아무리 생각해도 영은이가 훨씬 이뻐.-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었으나 더 이상 피자를 쳐다보기도 싫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계산하는

곳에서 대건이 형을 만났다. 형 다음 학기에 복학하신다는데, 에 정말이지 한 학기 더 다니면 이

사람 저 사람들 덕에 무지하게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피자헛은 언제나와 같이 비쌌다. 남은 잔돈을 가지고 오락실로 향해 빡빡한 눈을 비벼 가며 틀린 그

림 찾기와 색깔 다른 버튼들 무지하게 눌러 대는 게임등을 했다. 오기로 한 나머지 셋 중의 한 명인

은실이가 와서 모두는 일단 자리를 잡고 앉기로 했다. (이 자리가 끝까지 그대로 갔다.)


예전에 살던 건물 지하에 있는 술집, 도화에 갔다. 겉에서 보기에는 별로 특색이나 장점이 없어 보였

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까 의외로 편하고 안락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일명 '주부도박단'으로도 유

명한 이들, 연말이라고 모인 것이니 타이타닉으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가지, 하고 입으로 말하면

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졸음이 밀려와 이미 컨디션은 소주 반병에서 한병정도 마신 상태와 비슷

했던 것이다. 어쨌든 게임은 진행되었다. 그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 은

종(은진, 잘 어울려!)과 은실은 분명히 그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 한 몸 보신하고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것에 헉! 감탄사를 내뱉어 대는 그 처참한 생존의식이라니...   소심해, 소심

해 라고 외쳐대며 금방 잔이 가라 앉을 것 같은데도 주루룩 부어 대던 이 호방한(...) 이들은 나중에

는 내 머리 한가닥을 머리끈으로 묶어 두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다섯 번째 멤버인 주희가 오기도 전에 폭군 영선군은 멀리멀리 가 버렸다. 타이타닉의 테크니션이라

고 불리우는 은실의 옆에 앉은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저녁으로 먹은 피자가

멋진 시너지 효과를 내 주어 속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주희가 오고 나서 분위기는

더욱 상승되었다. 술잔에만 신경 쓰느라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이

무렵 하사받은 머리끈 질끈 묶인 머리 한 가닥을 매만져 보기도 하고. 마지막 멤버인 수가 오고

나서 좌중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어젯밤 자리에서의 절정이다. 영선군이 너무 일찍

혼자 가 버리는 바람에 경각심이 들어 마음 편하게 취하지는 못 했던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수가 계산을 하는 것으로 모두 입을 맞추어 두었던 탓이다. 정작 수는 술 몇 잔에 그억그억 토하다

가 띨링 만원을 냈지만. 자리를 파하고 나와서 다음 자리를 의논하였는데, 나는 수가 곧 죽을 듯이

토해대는 통에 챙겨서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지난 여름 강릉 경포대에서 취한 것을 치우던 기억

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신경이 어찌나 쓰이게 굴던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릴 곳도 안 되었는데 잠깐 다른 곳 보는 사이에 계단을 반쯤은 내려가질 않나, 내리

기 두정거장 전부터 출구를 막고 계단에 앉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꺽꺽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수그

리질 않나. 어, 인간말종 같으니. 입학해서 함께 했던 날들 중에 가장 소량의 술로 가장 어이없는 모

습을 본 하루였다. 그래도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공익 아저씨 수군은 새벽에 일어나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동물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대공원으로 출근을 했다.


생각해 보면, 요새 들어 아무리 소주 한 병도 힘겹게 마신다지만 그래도 맥주잔으로 너댓잔 정도 마

셨을 뿐인데 정말이지 폭탄주의 위력이란 무섭다. 멀쩡히 이야기하고 수를 챙기기까지 했을 정도로

괜찮았던 컨디션의 어제였는데 열시간여를 자고 일어난 지금 머리가 꽤 아프다. 조심해야지.

폭탄주.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폭탄주. 연말 음주에서 폭탄주 다들 조심하시길. 어, 머리아파.



오늘은 드디어 소개팅. 저녁 여섯시 강남역.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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