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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1. 계장님

정확한 내 보직은 공항경찰대 교통'계'의 내근직이기 때문에, 최측근의 관리직은 교통'계장'님이다.


계장님은, 실로 순경 출신 관리직의 아이돌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분으로, 대장님 앞에서는 마치 갓

입대한 이경과 같은 모습으로, 직원 및 대원들의 앞에서는 경찰총장과 같은 모습으로 분하는 무쌍

한 변신술이 일품이시다. 특히나 교통계 사무실은 공항경찰대의 다른 계들이 모여 있는 통칭 '본대'

에서 멀찌감치 인적이 드문 곳에 있기 때문에 계장님이 황제와 같이 서식하시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겠다.


계장님이 하루 중 사무실에서 하는 일과는 대강 다섯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출근해서 인터넷

하기. 점심 먹고 낮잠자기, 흘끗거리며 돌아다니다 잔소리하기, 다 만들어다 준 서류에 결재사인하

기, 혹은 결재하며 잔소리하기. 서류작성이나 문서관리등이 한글로 하는 것인지 곰플레이어로 하는

것인지조차 모르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다 만들어서 전자결재로 올린 기안을 어떻게 결재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계장님은 그럼에도 사무실 내의 천하무적이다. (결재는, '결재'라고 쓰여진 칸

에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된다.)


적성을 잘 살려 이리저리 잔소리를 해 보지만 실제로 사무실 업무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모르시기 때

문에 대부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직원들이 이래이래서 이렇게 한 겁니다 이래서이래서 이건 안

됩니다하고 매번 설명을 해 주자 그때마다 분통을 차곡차곡 쌓고 있던 계장님은 어느날 '계장이 말하

면, 틀리더라도 그냥 듣고 잘못했다고 하란 말이야!'라며 발군의 제왕의식을 발현하셨다. 마침

그때 계장님의 눈을 보고 있던 나는 거기에서 생생한 진심을 읽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찰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낼 세금이 계장님의 월급과 연금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 가슴이 답답해진다. 계장님이 없으면, 교통계 전원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개인적 차

원의 문제가 아니라 공항경찰대 교통계 사무가 원활해지는 국가적 이익을 낳을텐데.

그의 밥값과 인터넷 야동 다운료로 매달 국고에서 삼백만원 돈이 나간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눈뜨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탈세인생에의 타당한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올 7월의 정기인사를 앞두고 교통계의 내외근과 직원 대원을 불문하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계장님이 본인께서 마음에 맞는 직원들에게 한껏 흡족하게 잔소리를 하실 수 있는 좋은 곳에 가시

길 바라게 된 것인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계장님의 실태를 경찰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익명투고하든지 혹

은 혹여 누가 앉기라도 했다간 사무실을 뒤집어 놓는 계장님의 낮잠용 침대 밑에 도시락 폭탄이라도

심어 놓아야 했음에도, 나태하게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던 안이한 우리에게 하늘이 벌을 내리신 것일

까. 너무나 눈에 띄는 아부로 윗사람들에게도 눈 밖에 나 있다고 정평이 나 있던 계장님이 무슨

백을 동원했는지 땡보 중의 땡보로 정평이 난 교통계장 직위를 굳건히 지켜내신 것이다.


비극적 사태에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직원 분들은 모두 다른 계를 지망하며 짐을

쌌고, 대원이라 소속을 옮길 수도 없어 손가락만 빨고 있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명 중 한명 꼴로 원한 곳이든 원하지 않은 곳이든 발

령을 받아 소속을 바꾸게 되었던 이번 정기 인사에서, 교통계는 공항경찰대 중 유일하게 계의 전원이

인사이동을 신청했다는 기록과, 신청한 여섯명 전원이 유임되었다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왕에 교통

계에 남게 된 것, 마음에 드는 직원들로 교통계를 채워 보겠노라 활발히 직원판매에 나섰던 계장님

의 노력과 정든 교통계를 떠나는 것까지 각오한 직원들의 애환 어린 결단들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

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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